제4권 風(바람의 장)

병법에서는 다른 유파의 도(道)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다른 유파의
여러 가지 실상을 여기에 써서 '바람의 권'으로 하였다. 다른 유파의 도를 알지
못하고는 나의 니덴 이찌 류(二天一流)를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다. 다른 유파의
병법을 살펴보면 어떤 유파는 큰 칼을 사용하여 힘이 강한 것만을 장점으로
해서 자기 유파를 내세우기도 한다. 또 더러는 짧은 칼을 쓰는 것만에 전념하고
있는 유파도 있다. 혹은 대도를 쓰는 기교의 가짓수에만 몰입하고, 대도의
겨루는 자세를 정면이다, 안쪽이다, 칭하며 자기 유파를 내세우고 있는 유파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진실한 도가 아니라는 것을 이 권에서 명확히 적어 도의

선악과 시비를 분명히 해 두고자 한다. 나의 니덴 이찌 류의 도리는 그들
유파들의 도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다른 유파의 사람들은 무예의 도를
생활의 수단으로 하고, 화려한 기교에만 열중하여, 그것을 하나의 간판으로
삼고 있어서 완전히 병법의 도로부터는 이탈되어 있다. 또 세상의 무예에
있어서, 병법을 그저 검술이라는 것으로만 작게 한계지어 오로지 칼을 휘두르는
훈련만 쌓고, 또 몸놀림만 익혀 기교를 숙달시킴으로서 이기는 길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이러한 것은 모두 도의 참된 길이 아니다. 여기에 다른 유파의 결함을
자세하게 적어 놓으니, 이것을 충분히 검토하면서 나의 니덴 이찌 류의 진수를
공부해 주었으면 한다.



다른 유파에서 큰 칼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다른 유파에서는 큰 칼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병법에서는 이것은 약한
유파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서든 상대에게 이겨야 한다는 도리를
터득하려고 하지 않고, 대도의 길이에 의지하여 적과의 거리가 먼 곳에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한 치라도 이득'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병법을 모르는 자의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병법의 도리를 모르면서
그저 대도의 길이에 의해 멀리서 승리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마음의 나약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적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서로 몸이 맞붙어 싸워야
할 정도의 거리에서는 칼이 길수록 휘두르기 어렵게 되어, 긴 칼이 오히려 짐이
되므로 짧은 칼을 쓰는 사람보다 뒤지게 된다. 기다란 대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할말이 있겠지만, 그것은 자기만의 이유에 불과하다. 세상의
현실적인 도리에서 보면 이치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 긴 칼을 갖지
않고 짧은 칼을 쓰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 장소에 따라 상하, 좌우 등이 막혀 있을 경우, 혹은 작은 칼밖에 쓸 수
없는 경우에도 긴 칼을 쓰려고 한다면 그것은 병법의 도를 깨우치지 못한
것이며 또 합당하지도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힘이 약해서 긴 칼이 부적당한
경우도 있다. 옛부터 '대(大)는 소(小)를 겸한다'라는 말도 있는 것 같이, 나도
무턱대고 긴 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긴 칼에만 집착하려는 마음이
싫다는 것이다. 전투에 적용시켜 생각한다면, 긴 칼은 많은 병력에 해당하며,
짧은 칼은 적은 병력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과
싸우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이긴 예는 수없이 많이 있다. 나의 니덴 이찌 류에서는 그러한
한쪽으로 치우치는 좁은 생각을 배제하는 것이다.

다른 유파에 있어서 강한 대도라는 것

대도의 사용법에 강한 대도니 약한 대도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강하게
치려고 생각하고 휘두르는 대도는 엉성하고 거친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는 결코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또한 대도를 세게 휘둘러 사람을 베려고 할 때, 무리하게
세게 칼을 휘두른다면 결과는 좋지 않다. 누구든지 적과 대적할 때 약하게만
베려고 한다든가, 또는 강하게만 베려고 생각하는 자는 없다. 단지 적을 베어
죽이려고 할 때는, 세게 베야겠다든가 약하게 베야겠다든가 하는 마음은 생각할
수도 없고, 오로지 적을 베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강력하기만한 대도로 상대의 칼을 세게 치면, 긴장이 지나쳐서 자세가
흐트러지며 반드시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상대의 대도에 강하게
부딪치면, 그 반동으로 자기 칼의 움직임도 그만큼 늦어지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에서 강한 칼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큰 전투에서 강력한 군세를
가지고 싸움에서 강하게 이기려면, 적측도 강력한 군세를 갖추고 싸움에 강하게
임하려고 한다. 그것은 어느쪽이나 마찬가지다.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이길수
있는 올바른 도리가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나의 니덴 이찌류의 도에서는
조금이라도 무리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병법의 지혜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 승리를 얻는 데 역점을 둔다.



다른 유파에서 짧은 칼을 사용하는 이유

짧은 칼로만 이기려고 하는 것도 참된 길이 아니다. 예로부터 칼은 대도와
소도로 구분하여 길고 짧음을 나타내었다. 일반적으로 힘이 뛰어난 자는 커다란
대도를 가볍게 휘두를 수가 있기 때문에 창이나 긴 장검까지도 그 유리한
조건을 활용해 사용한다. 굳이 짧은 칼을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짧은 칼로
상대가 휘두르는 대도의 틈을 노리고 뛰어들어 맞붙어 싸우려고 생각하는
마음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써 좋은 것이 아니다. 또한 적의 틈을
노리려고 하면, 모든 것이 후수(後手)가 되어 적과 얽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좋지 않다. 더우기 짧은 칼로 적중에 뛰어들려고 하거나 적을 이기려고 하는
방법은 많은 적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짧은 칼에만 익숙한 자는 많은 적에
대해 칼을 휘두르며 자유 자재로 설치고 다니려고 해도 적의 칼을 받아치는
결과가 되어 적과 얽혀 버리고 만다. 이것은 병법의 진정한 도라고 할 수는
없다. 같은 값이면 자기 몸은 강하고 바르게 유지하면서 적을 쫓아 뒤로
물러서게 한 다음 허둥대게 하여 확실하게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전투에
있어서도 같은 이치이다. 이왕이면 많은 군세로 적을 불시에 덮쳐 즉석에서
공략해 버리는 것이 병법의 진수인 것이다. 병법을 배움에 있어서 평소부터
받아치기, 빗나가게 하기, 몸을 빼기, 빠져 나가기 등의 것만을 한다면, 그런
습관만 몸에 붙어 남에게 끌려다니는 결과가 되기 쉽다. 병법의 도란 곧고 바른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고리로써 적을 몰아대고 상대를 정복할 수 있는 정신을
길러 나가야 한다.

다른 유파에서 대도의 사용법이 너무 많은 이유

다른 유파에서 수많은 댈의 사용법을 남에게 전하고 있는 것은 병법을 간판으로
내세워서 대도의 사용법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며, 초심자에게 위세를
떨쳐 탄복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병법에서 가장 배척해야
할 정신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베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벤다는 것은 무예를 아는 자건 모르는
자건, 여자이건 애들이건 다를 바가 없다. 굳이 다른 방법이 있다면 찌른다거나
후려쳐 베는 정도가 있을 뿐이다. 어쨋든간에 적을 벤다는 것이 병법의 도이고,
이 방법에는 많은 방법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장소와 그때의 사정에
따라서, 예를 들면 위나 옆이 막혀있는 곳에서는 칼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기
때문에, 대도를 잡는 방법으로 5방(五方)이라 하여 다섯가지 종류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밖에 손을 뒤튼다든가 몸을 굽힌다든가 뛴다든가 하여 적을
베려는 따위는 진실한 병법의 도가 아니다. 사람을 베는 데 비틀거리거나
구부리거나 해서 벨 수는 없다. 아무 쓸모도 없는 일들이다. 나의 병법에
있어서는 마음도 자세도 똑바로 가지고, 적측을 비틀리고 일그러뜨려 상대의
마음이 흐트러진 때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가 승리를 거두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다른 유파에서 차림 자세를 사용하는 이유

대도의 차림 자세를 제일로 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차림 자세'란 것은
어떤 일에도 동요되지 않는 확고한 자세를 취하기 위한 자세이다. 성(誠)을
꾸민다든가 진(陳)을 친다는 것은 남이 대들어서 까딱도 않는 상태를 말한다.
병법 승부에 있어서는 무슨 일이나 선수를 잡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이것에
반해 차림 자세란 상대의 선수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점의 차이를 충분히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병법 승부의 도에 있어서는 상대의 차림 자세를
동요시켜 적이 예상도 못한 수단을 내밀거나 혹은 적을 낭패하게 만들어 화나게
하거나, 위험해서 적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이기는 것이므로, 차림 자세는
후수(後手)의 심리를 싫어한다. 따라서 나의 니덴 이찌 류의 도는 차림 자세로
있으면서 차림 자세가 없다. 전투의 경우에도 적수의 많고 적음을 생각하고,
전쟁터의 상태를 규명하며, 아군의 병력정도를 분별해서 그 장점을 살리도록
편성하여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알맞게 칼을 준비하고 적의
대도를 잘 받아 겨루려고 생각하는 것은, 창과 장점 같은 긴 것을 울타리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적을 칠 때는 반대로 목책을
빠져 나가 창이나 장검 대신으로 쓰는 기세가 중요하다.



다른 유파의 주목이란

'주목'이란 것은 그 유파에 따라 적의 대도에 눈을 두는 자, 또는 손에 눈을 두는
자, 혹은 얼굴에, 혹은 발에 눈을 두는 자가 있다. 이와 같이 특별히 어딘가에
눈을 두려고 하면 마음에 흔들림이 생겨서 오히려 병법에 방해가 된다
. 예컨데
공을 차는 사람은 공에 눈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갖가지 어려운
공차기를 교묘히 해 낼 수가 있다. 무엇이든 익숙해짐에 따라 공 그 자체를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곡예를 하는 자들도 그 기예를 숙달하여 문짝을 코
위에 세우기도 하고, 몇 개씩이나 칼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데, 이것
역시도 착실히 눈여겨보는 것이 아닌데도 평소 익숙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잘
해 낸다. 병법의 길에 있어서도 그때 그때의 적과의 싸움에 익숙해서 남의
마음의 경중을 알고, 무예의 도를 터득하게 되면 대도의 원근, 지속까지도
자연히 잘 보인다. 병법에서의 주목은 총체적으로 상대의 심리 상태를 읽어내기
위해 심안에 작용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투에 있어서도 상대의 형세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관(觀)과 견(見)의 두 관찰법에서 관(마음을 봄)의 눈을
강하게 하여 적의 심중을 간파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의 상황을 꿰뚫어
보며 대국에 눈을 붙여 그 싸움에서 어느쪽이 유리한지를 판단하여, 그때
그때의 적과 아군의 강약을 보아 확실한 승리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다수의
전투에서도 1대 1의 싸움에서도 작게 보아서는 안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자질구레하게 보기 때문에 큰것을 못보고 갈피를 못잡는 그런 마음이 되어
확실한 승리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이 도리를 잘 검토하여 단련할 필요가 있다.

다른 유파의 발동작

발의 동작에는 들뜬 발, 뛰어오르는 발, 내디뎌 좁혀지는 발, 까치걸음 등 여러
가지 발을 빨리 움직이는 방법이 있다. 나의 병법에서 보면 이것은 모두
부적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들뜬 발을 꺼리는 이유는, 싸움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발이 들뜨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발은 단단히 딛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뛰어오르는 발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뛰어오르려고 할 때 정지 상태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고, 또 뛰어오른 직후에도 다음 동작의 자유를 잃기
때문이다. 몇 번씩이나 뛸 필요는 없기 때문에 뛰어오르는 발은 좋지 않다. 또한
뛰어오르는 발은 뛰어오른다는 기분이 있으면 좋은 성과도 거둘 수 없다.
뀌어오르는 발은 기다리는 발이라 해서 적에게 선수를 잡히는 발동작이기에
특히 싫어하는 발동작이 된다. 기타 까치발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빠른
발놀림이 있지만, 계곡의 개천, 돌밭, 오솔길 등에서 적과 대적하게 될 때도
있어서, 곳에 따라서는 뛰어오를 수도 없고, 재빠른 발동작을 할 수 없는 곳도
있다. 나의 병법에서는 발놀림이 싸울 때나 병상시나 다르지 않다. 평소에 길을
걷듯이 적의 박자에 따라, 몸의 상태에 맞추어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발동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투에서도 발의 동작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적의 작전도 모르고 함부로 서둘러 달려들면, 박자가 허물어져 이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 늦은 발놀림은 적이 허둥대며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없고, 이길 기회를 놓쳐 재빨리 승부를 겨룰 수밖에 없게 된다. 적이 허둥대며
허물어지는 상황을 잘 판단하여 적에게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도록 해서
이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유파에서 빠름을 강조하는데......

병법에서 빠르다는 것은 참된 도가 아니다. 빠르다는 것은 사물의 박자의
이음세가 맞지 않기 때문에 빠르다거나 늦다고 하게 된다. 그 길의
고수(高手)라고 할 수 있는 자의 동작은 빠르게는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히갸꾸(飛脚)'라고 하여 하루에 400리나 500리씩 가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
역시 아침부터 밤까지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다. 미숙한 사람에게는 하루종일
달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들은 걸음의 박자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연예의 길에서 능숙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서투른 사람이 따라 부르면, 늦는
것 같아 초조한 마음이 생긴다. 또
한 도용한 곡인 '노송'도 서투른 자가 북채를
잡으면, 늦는 것 같아서 서두르게 된다. '다까스나꼬'는 급한 박자의 곡이지만,
빠르게 치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서두르면 구른다'라고 하여 박자의
2이음이 잘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늦는 것도 좋지 않다. 모든 능숙한
사람이 하는 일은 느긋이 보여도 빈틈이 없다. 무슨 일이나 능숙한 사람이 하는
일이 바쁜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비유와 마찬가지로 그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특히 병법의 도에 있어서는 빠른 것은 좋지가 않다. 그
이유는 장소에 따라 습지, 늪지 등에서는 몸도 발도 빨리 나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칼은 더 더욱 빨리 벨수는 없다. 빨리 베려고 하지만 부채나 소도를
쓰는 것 같이 할 수는 없으므로, 손목을 베려고 해도 전혀 베어지지 않는
것이다. 잘 분별해야 한다
.
전투에서도 역시 무턱대고 서두르는 것은 좋지 않다.
'베개를 억누른다'는 기분으로 한다 해도 조금도 늦어질 것이 없다. 또한 상대가
무턱대고 서두를 떠는 반대로 취하는 것처럼 이쪽은 조용히 서두르지 말고
상대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마음의 연구와 단련이
필요하다.

다른 유파에서 말하는 안과 밖이라는 것

병법에서는 무엇을 밖이라고 하고, 무엇을 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예능의
길에서는 극의비전(極意秘傳) 등이라 해서 오의라든가 초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적과 대적할 때는 겉으로 싸우고, 안에서 벤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나의
병법의 교수법은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기량에 따라서 하기 쉬운
것부터 익히게 하고, 빨리 이해할 수 있는 도리부터 먼저 가르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사람의 이해력이 진보되는 정도를 분별하여, 차츰 깊은 도리를
가르치도록 힘쓰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개는 적과 대적할 때에 체험한
것을 익히게 하는 것이므로 안이라든가 입구라든가 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산의 깊숙한 안쪽을 찾아갈 때 , 좀더 안으로 가려고 하면 오히려
다시 입구로 나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도에 있어서도 안으로 들어가
오히려 얻는 것이 있는가 하면, 초보의 소양을 꺼내 보이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다.
특히 싸움의 도에 있어서는 무엇을 비전으로 하며, 무엇을 공개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나의 니덴 이찌 류의 뜻을 전함에 있어서, 서약, 조문 같은
것을 나는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길을 배우는 자의 역량에 의하여
도의 진수를 가르치고, 병법을 가르치는 가운데 몸에 익히게 되는 여러 가지
결점을 버려, 자연히 무사의 도의, 진실의 소재를 배우게 하여 의혹이 없게 하는
것이 나의 병법의 가르침이다.

이상 다른 병법의 9개조에 걸쳐 바람의 권으로써 적어 보았다. 본래는 그
하나하나의 유파에 대해 입문에서 오의까지를 상세히 써 놓아야 할 것이지만,
일부러 어떤 류의 큰 대목 등의 이름을 적는 것을 피했다. 그 이유는 각자의
유파에 의한 판단이나 이론은 사람에 따라 마음대로 달리 말할 여지가 있는
것이며, 같은 유파에서도 다소는 견해차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며, 후대를
위해서도 어느 류의 어느 길이란 것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유파의 대요를
아홉 가지 특징으로 나누어보았지만, 세상의 참된 도리에서 보면 긴 칼에
치우치고, 혹은 짧은 칼을 고집하여 강약에 사로잡히거나, 거칠다거나
자질구레하다고 하는 것이 모두 치우친 도란 것은, 어느 유파의 어느 단계라고
밝히지 않더라도 모른 사람에게 이해되리라고 본다.
나의 니덴 이찌 류에는
대도의 쓰임새에 오의나 초심도 없다. 또, 극의(극의)의 차림 자세 가튼 것도
없다. 단지, 바른 정신에 의해 병법의 덕을 몸에 붙인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뿐이다.



제5권 空(하늘의 장)

니덴 이찌류의 도를 공(空)이라고 써서 밝혀둔다. '공'이란 의미는 사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즉 인간이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공'은
없다는 것이다.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것이 즉 '공'이다. 세상의 속된 견해로서는,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을
'공'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참된 '공'이 아니다. 모두 허황된 마음인 것이다.
병법의 도에 있어서도, 무사로써 도를 행하는 데 무사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공이 아니며, 여러 가지로 혼란이 있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공이라고
말하고 있는게, 이것은 참된 의미의 공이 아니다. 니덴 이찌 류의 병법의 도를
확실히 습득하여 그밖의 무예도 몸에 붙여 무사가 행할 도를 밝혀 잘 터득하고,
마음의 혼란을 피하고, 항상 게으르지 않으며, 심의(心意)의 두 마음(정, 중)을
닦고 관견(觀見)의 두 눈(마음과 눈)을 밝게 연마하여, 조금도 흐림이 없는,
혼란과 구름이 개인 상태야 말로 참된 공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참된 도를 알지
못하는 동안에는 불법(佛法)이건 세상사의 법이건,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해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마음의 아전인수격의 견해나 왜곡에 의해
올바른 도(道)에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잘 분석해서 곧은 정신을
근본으로 하는 진실된 마음을 도로하여, 병법을 널리 행하고 바르고 밝게
대국을 판단할 수 있도록 공(空)을 도(道)로 하며, 도를 공으로 보아 행해야 할
것이다. 공의 마음에는 '선'은 있지만, '악'은 없다. 지혜가 있고, 도리가 있으며,
도가 있어야 비로소 마음은 '공'이다.

쇼호 2년(1645) 5월 12일에 이 글을 맺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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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은빛늑대(天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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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독 한 20번은 한것같습니다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