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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도관 사상 '최강의 사나이' 유술의 대가 "사이고 시로"
    무림 객잔/무예 이야기 2016. 8. 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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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이고 시로 탄생


    사이고 시로는 원래 아이즈번 출생(1863)으로 말투에 아이즈 사투리가 심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키는 일본인 중에서도 작은 편이라 153센티 정도였다는게 정설입니다.

     근데 사이고는 남들과는 다른 신체적 특성이 있었는데...바로 사이고의 발가락은 무척 길어 물갈퀴 같았다고 합니다.(곰발톱 같았다는 말도 있고, 문어발과 같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하여간 발가락이 굉장히 길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합니다.)

    사이고 시로

    사이고 시로

     사이고는 당시 아이즈 출신이라면 보통 익혔다는 아이즈의 오토메(오토베가 아니라 오토메라고 합니다, 이에 정정합니다. 이것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각 다이묘-영주 쯤 되겠군요-가 다스리는 지역마다 지역마다 할당된 각 지역의 고유 유술을 통칭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타 지방으로는 갖고가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하는구요. 그래플링공장님께서 교정해 주셨습니다.)유술을 어린 시절부터 익혔습니다. 아이즈의 오토메유술은 여러가지 공격 테크닉을 가진 아이즈 비전의 무술로써 그 이름이 높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비전이라고 할 만한것이 바로 오시키우치라는 기술들인데 이것은 앉은 상태에서 상대를 역관절꺾기로 쓰러뜨리는 기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막부시대에는 대다수의 영주들이 성을 짓고 살았고, 그 성의 영주가 있는 본당 안에서는 무릎을 꿇고 움직이는 슬행(膝行)의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영주가 위급할 때 앉은 상태에서도 적을 막을 수 있는 테크닉을 연마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즈 오토메유술의 오시키우치는 바로 대동류 합기유술의 원조로써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합기도 계의 전설이신 최용술 도주가 익힌 합기유술도 바로 이것이 뿌리이죠.(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현재의 해외의 대동류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동류를 제외한 모든 무술 연구가들은 다 인정하고 있구요, 의견은 분분하지만, 저는 일단 다수 의견쪽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시로는 어린시절 아이즈의 비전 오시키우치의 이름난 고수였던 사이고 타노모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사이고 타노모는 사정상 호시나 치카노리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고 닛코의 토쇼라는 궁전에서 신관 노릇을 하고 있는 아주 고위층의 인물이었죠. 시로의 아버지는 하급군인으로써 타노모의 집의 가신(가신 중에서도 가장 하급의 가신이었다고 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호시나 치카노리는 그렇게 지체가 낮은 시로를 어린시절부터 잘 돌봐 주었고 거기다가 아이즈 비전의 오토메유술을 직접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쳤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유일전승이라는 비전중의 비전인 오시키우치까지 가르쳤죠.시로가 강도관 입문후 2년째인 17세 되던해에는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본디 가장 하층민 계급이던 시로가 그런 지체높은 집의 양자로 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역시 가장 유력한 것은 타노모의 숨겨둔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이후 호시나 치카노리(타노모)는 시로에게 사이고 시로라는 이름을 쓰도록 하고 사이고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려고 합니다. 메이지 21년에 정식으로 정부의 허락을 얻게 되었죠.

    (조금 씁쓸한 것은 미국, 캐나다등지의 대동류 합기유술 사이트 등에서는 이 사이고 시로를 대동류의 마스터라고 선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사이고는 대동류를 익힌 적이 없습니다. 아이즈의 오토메유술을 익힌 것이죠. 그런데도 "대동류를 워낙 오래 연마했으므로 유도 선수들 따위는 상대도 안되었다!"라는 억지 논리를 내 세운 영문 사이트를 보니 할 말이 없더군요. 한 이탈리아 사이트-스페인어랑 비슷해서 그럭저럭 읽을만 하더군요, 땀좀 흘렸습니다만 ^^-에서는 "대동류의 도움을 부인할 수는 없다. 16세에 지도원의 자격을 딴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닌가?" 이렇게 설명해 뒀는데 아무래도 서양쪽에서는 당시의 복잡한유술계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2. 사이고 시로, 운명의 스승 가노와의 만남!

    사이고 시로

    원래부터 일찌감치 무도를 접했던 사이고 시로는 1882년에 상경해서 이노우에 쿄타로의 천신진양류 유술도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노 지고로 편에서 설명했듯이 가노 지고로가 18세때부터 익혔던 무술이 바로 천신진양류였고, 이노우에 쿄타로는 바로 가노의 동문 선배였죠. 인사차 들렀던 가노의 눈에 바로 이 천재 사이고 시로가 눈에 띄고 만 것이죠.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바로 교수로 임명된 수재이자 천신진양류 최강의 유술가였던 가노 지고로는 사이고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이노우에에게 부탁해 그를 강도관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다다미 12개와 9명의 제자만으로 시작된 강도관...하나의 인재가 아쉬운 가노였습니다. 게다가 유도라는 신무술을 23세의 어린 나이로 창안해서 전 유술계를 적으로 돌려버린 것도 너무나 부담스러웠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사이고 같은 어마어마한 인재를 찾은 가노의 기분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겠죠^^(가노에게 사이고를 보내준 이노우에 쿄타로는 그 이후에도 요코야마 사쿠지로라는 걸출한 강자를 가노에게 보냅니다. 이 이노우에라는 인물은 천신진양류의 강자들을 강도관에 많이 입관시켰는데, 이것은 극도로 폐쇄적인 양심류가 판을 치는 유술계에 변화를 원하는 진보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저런 상황을 조합해 볼 때, 강도관이 이름을 날리게 된 배경에는 이 이노우에라는 남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다음해인 사이고가 16세 되던 때에 초단을 취득 최단시간에 초단을 따내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가노는 자서전에서 사이고에 대해 "메치기의 극한에 달한 남자였다, 나는 그보다 강한 인간을 지금껏 본 일이 없다."라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가노 지고로가 익힌 무술은 밧다리 후리기와 깃 조르기를 주무기로하는 천신진양류와 메치기를 주무기로 하는 기도류 유술 이 두가지가 근간이었다 합니다. 거기다가 유술의 체계화를 위해 타 유술의 기술들 중에서도 쓸모 있는 것은 다 받아 들였습니다.)


    3. 강도관 4천왕! 도츠카 양심류와의 숙명의 사투

    가노 지고로

    가노 지고로


    가노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던 유술유파는 도츠가 양심류였고, 누구든 유술로 이름을 날리려면 그걸해야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고 합니다.
    가노는 고류 유술을 배격하면서 유도를 만들려는 생각은 한 일이 없지만 양심류 쪽에서 보면 가노는 정말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강도관을 만들기 전에 이미 가노선생이 천신진양류와 기도류 유술의 마스터로써 양심류의 고수를 몇번 격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죠. 20세에 불과한 가노 지고로에게 양심류의 고수들이 나가떨어져 버리는 광경은 당시로써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당시 가노선생은 18세때부터 무도를 익힌 '초짜'였던 것이죠.(모든 방면에 능한 천재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같은 천신 진양류와 기도류에 양심류를 이기는 다른 사람은 없었던 관계로 양심류는 계속 최강의 이름을 유지합니다.(또한 가노 선생의 상대로 최고수를 내 보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보통 도장끼리 시합은 10명 정도를 내 보내는데, 가노선생은 무패였지만 양심류는 압도적으로 이기는 시합에 굳이 가노선생의 상대로 에이스를 쓰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러나 강도관이 생기고 가노가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자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거기에는 강도관 사천왕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사이고 시로가 입문하기 전에 먼저 입문해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눈에 띄는 강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야마시타 요시카즈(요시츠쿠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가노 지고로

    강도관시절의 가노 지고로

    이후 미국에 건너가 루즈벨트에게 유도를 가르치고, 미군장교들에게도 전수한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도관 4천왕중 유일하게 10단을 추증받은 인물로 가노 지고로의 유도를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이해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와 야마다(이후 토미다 가의 양자가 되면서 토미다 츠네지로로 개명) 츠네지로 이 두명이었습니다. 야마시타는 이미 사범대리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고, 야마다 또한 강도관의 분관을 맡고 있던 사범이었습니다.(이 둘은 가장 스탠다드하고 교과서적인 유도를 구사하는 사람들이어서 이후에 실전 전적보다는 지도자로써 이름을 남기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둘은 강도관 초기에 계속해서 도장깨기를 하러 찾아오는 고류 유술가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결투를해야했습니다. 가노가 직접 나설 수는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타류 유술의 고수들에 비해 월등하다고는 볼 수 없는 실력이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이고 시로의 등장으로 형세는 완전히 뒤집히게 되죠. 어느 누구도 사이고의 소매조차 잡아보지 못하고 메치기를 당해 날아가는 바람에 스승 가노가 타류 유술을 격파하며 얻었던 최강의 이름을 사이고가 그대로 이어가게 됩니다. 여기다가 이노우에 쿄타로의 천신진양류 도장에서 필살의 던지기인 덴구(天牛->여기에 대해서는 천우가 아니라 天狗라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만...어느쪽이든 무관할 듯 합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후자인 듯 싶군요^^;; 실제로 요코야마가 기술명을 어디다 적은 일이 없으니 발음 때문에 후대에서 헷갈리게 된 듯 합니다.)던지기로 최강자의 명성을 날리던 요코야마 사쿠지로가 가세하면서 강도관 4천왕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 한차례의 패배도 없이 승승장구, 유도의 이름을 조금씩 높이기 시작하게 되죠.

     그리고 사이고 시로는 메이지 19년 강도관 5단을 취득, 명실상부한 최고수로 인정받게 됩니다. 사실 입관 4년만에 5단을 땄다는 것은 사이고가 그 전에 배웠던 아이즈 오토메유술의 오시키우치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당시의 강도관은 승단을 하려면 같은 급수의 상대를 7명을 연속으로 상대해 이겨야하는 가혹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1단이 되려면 갈색띠 7명을 연속으로 제압해야하는 것이죠. 물론 무조건 이겨야하며 무승부는 안되었다고 합니다.(후지와라씨의 만화 '콘데 코마' 에서는 한명만 이기면 승단되는 것처럼 해 놓았는데 이것은 고증을 제대로 못한 탓입니다. 작가 두분이 모두 그레이시 유술의 연구에만 치중한 나머지 유도에 대해선 너무 몰랐다고 볼 수 있구요.)

     거기다 한 참 서양인들이 일본에 들어오기 시작해 나라의 분위기가 흉흉한 때였는데 마침 사이고 시로가 행패를 부리던 이스트레이크라는 영국인을 한팔 업어치기로 바닥에 처박아 졸도시키는 일이 터지는 바람에 강도관의 명성은 엄청나게 높아지게 됩니다.(가노 지고로의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메이지 19년이었다고 하죠.)

     계속되는 강도관의 승리에 결국, 위기를 느낀 도츠카 양심류의 총사인 도츠카 히데키는 고류 유술의 필두가 되어 일본 무도의 패권을 놓고 강도관과 최후의 승부를 내려고 하게 되는데...


    4. 필살! 야마아라시


    결국 도츠카 히데키는 최종 승부를 내기로 결전장을 보내고 가노는 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비밀병기로 요코야마 사쿠지로를 데려 온 것이었죠. 1886년(1890년이후라는 설도 있음) 무코우가오카의 야요이 신사에서 경시청 주최로 양대세력의 대결이 대회형식으로 치뤄지게 됩니다. (캐나다와 미국 쪽의 사이트에서 이 결투에 대해 정말 리얼한 해설을 해 뒀던데, 읽다보니 무슨 실황 중계를 보는 느낌이^^) 원래는 두게임만 약속되어 있었는데 야마다와 야마시타가 간단히 승리를 해 버리고 맙니다. 야마다와 야마시타는 사천왕중에서는 약하다는 평을 받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간단히 이겨버리자 경시청 유술대회를 구경온 사람들에게 강도관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마음속에 세겨지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일본의 결투 관습이 보통 2명으로 싸우자고 하면 그것은 4~5명의 대결을 의미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그냥 형식적으로는 간단한 친선대회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죠. 그러나 한 두명이 패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4~5명까지 붙이는 걸로 늘어나고 마지막에 에이스들끼리 끝장을 봐야하는 스타일이 유행이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도츠카 히데키는 자신의 비장의 카드를 내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경시청의 유술총감을 맡고 있었던 유술 최강자중 하나인 나카무라 한스케(양심류의 분파인 양이심두류의 마스터였다고 합니다.)였습니다. 키가 180, 몸무게가 90킬로가 되는 당시 일본으로써는 거한중의 거한이라 할만한 사람이었죠. 그러나 가노는 히데키가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걸 미리 간파하고 있었기에 아껴두었던 비밀병기 요코야마를 내 보냅니다. 요코야마 또한 나카무라와 마찬가지로 거한이었기에 둘의 대결은 그야말로 볼만한 것이었다 하죠. 요코야마는 가장 파워풀한 유도를 구사하는 스타일이었는데, 특히 그의 필살기였던 덴구던지기(어깨로 들어메치기와 유사한 기술)는 한번 걸리면 무조건 상대가 실신하게 될 정도의 파괴력이 있는 것이었죠. 그러나 상대는 당대 최고수중의 한명이었고, 덴구던지기의 특성상 준비동작이 크기 때문에 쉽게 간파되어, 그 기술은 먹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나카무라 또한 계속 기술을 걸려고 했지만 요코야마는 그야말로 바윗덩어리 같은 중심을 가지 사나이라 꿈쩍도 안했다고 합니다.  서로 당신기(급소 가격기)까지 날려가면서 기술을 넣어보려 하지만 둘의 실력이 거의 대등한 관계로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될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무도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시청 무술총감이라는 엄청난 지명도를 가진 나카무라를 상대로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공격을 퍼붓는 요코야마의 모습에 당시의 일본 무술계 인사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요코야마는 이제 20대 초반의 무도가였습니다. 요코야마의 나이만큼의 세월을 유술 수련에 정진했던 30세의 백전노장 나카무라가 그정도까지 고전을 한 것은 정말 큰 충격이었겠죠. 둘의 싸움은 무려 1시간이나 끌었다고 하는데요, 이를 심판이 중지시켜 무승부가 되고 맙니다. 나카무라와 요코야마는 둘다 내려오자마자 탈진해 쓰러져 버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한 사람을 남긴 양심류는 최강중의 최강이라는 '테루지마 신타로'(쿄타로라는 자료도 있고 그냥 타로라는 자료도 있음,테루지마라는 성도 불확실하지만 몇가지 문헌에서 언급을 하고 있음)를 내 세우게 되는데 이를 맞상대한 것이 바로 강도관 최강의 남자 사이고 시로였습니다. 거구에 장신이었던 테루지마는 사이고를 메치려고 여러번 시도했지만 계속되는 사이고의 중심잡기 때문에 메쳐지지가 않았다 하죠.(사이고는 평소 낙법을 연마하기 위해 지붕에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보통의 낙법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죠, 그래서 사이고의 별명이 고양이었다고 합니다. 던지려는 순간에 몸을 회전시켜 두발로 서 버렸다고 합니다.) 계속 메치기가 실패해서 당황한 테루지마가 주춤한 순간에, 사이고는 갑자기 좌자연체로 기본서기를 바꿉니다.(유도를 하시는 분들은 좌 자연체, 우 자연체 같은 용어는 익히 아시겠습니다만, 자연체라는 건 별것 아닙니다. 그냥 서 있는 것을 말하는데, 다음 기술을 걸때의 방향과 디딤발을 자연체를 통해 결정하게 되는것이 보통입니다.) 본래 우 자연체로 계속 시합을 했던 탓에 그쪽 방어만을 생각하던 테루지마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굳어버리게 되는데, 그 순간 갑자기 공중에 떠서 날아가 버립니다. 당시에 구경온 모든 무술가 및 구경꾼들은 이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메치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것이 사이고 시로의 필살기 중의 필살기 야마아라시였던 것이죠. 이 야마아라시에 테루지마는 그대로 실신해 버리게 되고...더군다나 사이고의 야마아라시는 상대방을 마지막 순간까지 확실히 감아서 측방낙법을 쓰지 못하도록 고안된 철저한 공격용 메치기 였기 때문에, 그는 몇일동안 의식을 찾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참고: 야마아라시?

    그 의미는 산폭풍이라는 뜻인데, 사진의 저 자세에서 상대의 다리를 발바닥으로 차면서 발가락으로 그 찬다리가 빠지지 않도록 꽉 쥔뒤 계속해서 뒤로 차올리면서 앞으로 메쳐 버리는 기술입니다. 메치기 방어의 기본인 좌우 이동을 봉쇄해 버리기 때문에 걸렸다 하면 나가 떨어졌다 합니다. 이후 아무도 쓴 일이 없고 그냥 저런 식으로 본만 남아있는 환상의 메치기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발가락이 평범한 사람이 쓸 기술이 아닌거죠^^ 타이밍 잡기도 무척 어렵고...그 천재 사이고 시로조차도 몇년이나 피를 토해가며 연마한 기술이라고 합니다. 끊어먹은 도복띠만해도 엄청났다고 합니다.(후지와라 씨의 만화, '콘데 코마'에 보면 발가락으로 상대의 다리 정면을 붙잡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잘못된 그림입니다. 야마 아라시는 비스듬하게 옆으로 차서 발가락으로 장단지 아랫쪽을 옆으로 잡아 올린 뒤 메치는 기술입니다. 후지와라씨의 베스트 셀러 '권아'에서의 팔극권 고증까지 의심하게되는 부분입니다. 또 마에다 미츠요가 야마아라시를 쓰는게 나오는데, 마에다는 야마아라시를 구사하지 못했습니다. 사이고의 뒤를 이을 천재라고 불리던 마에다 미츠요지만 야마아라시는 타고난 신체조건도 상당히 작용하는 기술이기 때문이죠.)


    5. 사이고 시로 전에 야마아라시 없고 사이고 시로 후에 야마아라시 없다!


    1886년의 결투로 완전히 밀려버린 도츠카 양심류는 1887년에 절치부심! 자신들의 대회를 통해 뽑은 최강의 강자 우케치 엔타로를 필두로 강도관과 열명씩의 선발을 내세워 다시한번 겨루게 되는데 이 승부에서 강도관 4천왕은 모두 승리를 거두고, 양심류는 3명의 무승부 외엔 전패를 하는 참담한 패배를 겪게 되면서 완전히 몰락합니다. 특히 양심류의 마지막 희망이던 우케치 엔타로는 사이고 시로에게 1분여만에 야마아라시의 제물이 되어 실신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강도관은 이로써 명실 상부한 최강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일본 최대의 무도조직으로 급부상합니다. 사이고 시로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사이고 전에 야마아라시 없고 사이고 후에 야마아라시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합니다.(기무라 마사히코의 "기무라 전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 기무라 없다."는 여기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무렵 동경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가노 지고로는 학장과의 마찰로 유학을 강제로 가게 되는데 관장대리로 사이고를 임명합니다. 명실상부한 가노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셈이죠. 그러나...


    6. 강제추방...방랑...그리고 죽음


    사이고는 1890년에 강도관에서 강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불명확하고 가노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부분만은 언급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아마 강도관 규정을 어기고 타류시합을 했기 때문인 듯 한데,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이고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고, 추방 후에는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던 스즈키 텐진에게 의탁하고 그곳에서 유술을 가르치게 됩니다.(이것이 후대에 사이고파 대동류 유술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됩니다. 대동류와는 별개의 것이죠. 얼마전 법정분쟁에 휘말렸다하는데 정확한 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쪽 사이트에서 그렇게 설명을 해 뒀더군요.) 차마 유도의 간판을 걸 수가 없었던 것이죠. 나가사키에 머물던 사이고는 중국으로 도항하게 되는데(도항안했다는 설도 유력합니다.-사실은 이게 더 다수설임) 이 때 가노 지고로에게 반성 및 용서를 구하는 의미로 '지나 도항 의견서'라는 것을 보냈고 이것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저는 도항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이유는 그의 말년의 사진을 보면 중국인들의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또한 스즈키 텐진에 의탁한 것도 1890년이 아니라 몇년후의 일이죠. 중간에 전혀 없는 기록들은 그가 중국에 있었다고 보는게 앞 뒤가 맞는 듯 합니다. 더군다나 보통은 일본의 전통신발인 게타를 싣던 당시의 관습을 감안하면 갔다왔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하여간 강도관에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떠돌던 사이고는 1922년 56세의 나이로 오노이치라는 곳에서 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이 소식을 접한 가노는 자신이 추방한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피를 토하듯 애통해했다고 하며 그 이듬해 사이고에게 6단을 추증했다고 합니다. 스승 가노 지고로는 1938년에 여행도중 히카와마루라는 배위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폐렴이었다고 하죠. 가노 지고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이고의 일을 애통해했다고 합니다.(바로 그 3년 뒤에 그의 또 다른 수제자였던 마에다 미츠요가 브라질에서 죽게 되죠. 가노의 수제자들은 하나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7. 사이고 시로, 소설/영화로 부활-스가타 산시로!


    강도관 사천왕중 한명이었고 마에다 미츠요와 미국으로 떠난 일이 있었던 토미다 츠네지로는 그의 아들에게 사이고 시로의 강함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해 줬다고 합니다. 강도관 최강의 남자였고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을 유도의 천재의 이야기를 말이죠. 그 토미다 츠네지로의 아들 토미다 츠네오는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합니다. 무적의 야마아라시를 날리는 그야말로 폭풍같았던 최강의 유도가의 전설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죠 그것이 바로 소설-스가타 산시로였습니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공전의 힛트를 기록했고 전후에는 신화적인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화 하게 됩니다.(세계 최고의 거장에 속하는 구로자와 감독의 데뷔작이 바로 이 스가타 산시로였다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면 수도관이라는 유도장의 야노 타다시 고로(가노 지고로가 모델인듯^^)라는 관장이 그들의 제자들과 함께 싸워나가는 것이 주된 골격이며, 스가타 산시로는 바로 그 수도관의 에이스로 등장합니다. 이 소설속의 스가타 산시로는 사이고와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요, 역시 압권이라 할만한 것은 스가타 산시로가 야마아라시를 구사하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과 영화에서 가라데를 구사하는 악당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의 가라데에 대한 일본인들의 나쁜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죠. 상대를 보호해주는 방법도 갖춘 유도와는 달리 상대를 때려서 직접 부숴버리는 가라데는 그들의 입장에선 야만적인 무도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최영의님의 공수도 교본에 보면 "스가타 산시로로 인해 가라데의 인식이 결정적으로 나빠졌다, 그렇지만 공수가가 유도가에게 그렇게 진 적은 없다!"라고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오키나와 가라데를 처음 일본으로 초청한 것이 가노 지고로였고, 일본에 가라데라는 무술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오키나와 강유류 사범들의 강도관 연무이후라고 합니다.(가노선생 본인은 가라데를 좋아했던 것이죠^^)

    공전의 힛트를 기록한 스가타 산시로는 그 속편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1년 후지 티비에서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하게 됩니다.

    이 소설과 영화가 등장한 이후, 일본에서는 최강의 유도고수에게 '스가타 산시로'라는 별명을 붙이는 것이 거의 관례가 되어 버렸습니다. 만화 '군계' 19권을 보면 유도 천재에게 '헤이세이의 산시로'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것이 나옵니다. 이 말은 헤이세이(지금의 일본의 연호) 시대의 스가타 산시로라는 뜻으로, 그가 최강의 유도고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브라질에서 온 유술 소년의 이름도 산시로라고 되어 있죠 그 때문에 그 만화 중간에 "누가 산시로인지 가려보자!"라는 장면이 나오는 겁니다. 누가 스가타 산시로의 칭호를 가질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자는 의미라고 풀이할 수 있죠.바꿔말하면 헤이세이의 사이고 시로를 가리자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이고 시로가 유도사에서는 거대한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죠. 아무리 기무라 마사히코같은 사람들이 대단했다고 해도, "누가 이시대의 기무라인지 가려보자!"...이런 말은 안하니까요. 아마 이런 배경 스토리를 모르셨다면 그 부분에 대해 굉장히 의아하셨을거라고 생각합니다.(군계의 번역을 담당하신 분이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 전혀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생소한 내용을 그대로 번역하기 보다는 간단한 주석등으로 설명을 해 주셨더라면 훨씬 좋았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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