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전설의 대결


쇼와 26(1951년)년 10월... 리오 데 자네이루의 마라카난·스타디움...

세기의 유술 시합 단판 승부가 벌어졌습니다.

 한때 세계 최강의 격투가라는 칭호까지 얻었던 전설의 유도가 '마에다 미츠요'의 후계자 리오·그레이시(170cm/63kg) 그리고 기무라 전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후에 기무라 없는 당대 최강의 유도가기무라 마사히코(175cm/85kg)의 3 R 각 라운드당 10분의 결투.(기무라의 키에 대해서는 170이라는 자료도 있고 178이라는 자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것은 175였다는 자료입니다.

기무라 마사히코

이에 175로 일단 쓰기로 합니다.
 모 스포츠 신문에 나온 UFC의 역사라는 글을 보면 무슨 기무라와 가토가 전부 100킬로가 넘는다고 해뒀던데, 그건 제대로 자료를 뒤져보지 않고 글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기무라는 85킬로, 가토는 80킬로였습니다. 게다가 기무라와 엘리오가 10살이나 차이가 나서 나이에서도 기무라가 유리했다고 해 둔 것 같았는데 기무라 34, 엘리오42 즉 8살차이였습니다.
 그 칼럼 중 마에다 미츠요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잘못된 점이 많이 보였는데 엘리오 편에서도...많이 안타깝더군요. 너무 유술가들의 편을 들어주고자하는 어투가 역력해서...)

 이 시합 전에 가토 5단이 엘리오에게 패배하는 바람에 기무라는 비장한 각오로 시합장에 나타납니다. 물론 웃음을 머금고 있기는 했었지만 그 속은 편치 않았겠죠. 한번도 맞서본 일이 없는 유술이라는것과 맞서야한다는 것 또한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기무라 마사히코의 나이 34세. 전성기를 한참 지나버린 그가 브라질까지 오게 된 것은 자신이 총 책임자로 있는 '프로유도'의 홍보를 위해서였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레이시 유술과 싸운건 강도관 유도가 아니라 프로유도였던 것이죠. 물론 이때 이미 프로유도 단체는 소멸했었지만, 스스로의 유파는 프로유도였고, 이를 이용한 프로레슬링을 계획하고 있었죠.

  시합장에 들어서자 기무라는 흠칫 놀라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는 관이 놓여 있었던 것이죠. 엘리오는 기무라에게 그것은 기무라가 죽으면 들어가게 될 관이라고 하며 자신감을 피력했습니다. 엘리오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고 하죠.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관이라고 들고 나온 걸 보고 보고 웃는 사람은...^^

  당시 엘리오는 수많은 발레투도 시합에서 패배 없이 승리를 거두던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고 비교적 자신이 없는 분야였던 타격을 배제한 상태에서 유술만으로 기무라를 상대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기세가 등등했습니다.(카지와라 잇키 씨의 공수 바보일대에서는 엘리오 그레이시를 200킬로가 넘는 괴물 유도가라고 묘사해 두었고, 방학기씨의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인디오 레슬러라고 묘사해 뒀지만...익히 아시다 시피 엘리오의 체격은 무도가로써 보통도 안되는 체격이었죠.) 엘리오가 타격이 약하다는 것은 이후 산타나에게 패배하면서 증명이 되기는 하지만 어쨌건 당시 브라질에서 엘리오라고 하면 최강의 격투가이자 유술가였습니다. 엘리오는 격투 전적에 패배라고는 2패 뿐인데 산타나와 기무라에게 당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오는 서쪽 문을 통해, 그리고 기무라는 동쪽 문을 통해 등장합니다. 브라질에는 일본교민도 많았고 엘리오가 그렇게 일방적인 야유속에 경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브라질인들의 엘리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그 경기에 브라질 대통령까지 동참햇다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무라는 시합장에 오르면서 다시 한번 놀라게 되는데 바닥이 보통의 것보다 많이 물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무라의 필살기인 밧다리 후리기와 한팔 업어치기를 봉쇄하기 위한 엘리오의 전략이기도 했고, 당시 유술 시합에 쓰이던 바닥은 유도에 비해 많이 무른 소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본측에서는 엘리오의 계략이었다고 하기는 합니다만..저는 두사람 다 좋아하니까 어느 편을 들지는 않겠습니다^^

  1라운드가 시작되자 기무라는 엘리오를 메치려 하지만 엘리오의 번개같은 스피드에 쉽게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팔힘은 일본 제일이라는 정평이 나 있었던 기무라 답게 엘리오를 붙잡아 넘어뜨리고 누르는데 성공합니다. 이 때 엘리오는 이미 귀가 찢어져 피가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무라는 엘리오를 죽이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괜찮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엘리오는 정신력이 엄청난다고 정평이 나 있었던 만큼 당연히 그 정도로는 굴하지 않았죠. 그러다가 엘리오가 순간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기무라의 조르기와 꺾기를 방어합니다.(솔직히 제 생각에는 실신한 건 아닌 듯 한데, 일본측 자료에는 그렇게 되어 있더군요.) 기무라는 엘리오와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닌 만큼 "무리하지 마라!"라고 두번 정도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엘리오는 일어를 어느정도 알아들었다고 하죠.)

기무라 마사히코

   2라운드가 되자 엘리오의 끈질김에 혀를 내두른 기무라는 하는 수 없이 팔 얽어 비틀기를 써버립니다. 훗날 기무라 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이 기술은 사쿠라바가 그레이시 헌팅을 할 때 응용되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엘리오는 버티지만 이미 팔관절이 완전히 나가버린 상황이었죠. 우두둑 하는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관중들이 들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엘리오는 그런 상태에서도 계속 싸운다고 하였지만 보다못한 카를로스 그레이시가 타월을 던져 버립니다.

  기무라는 이 경기가 끝나고 나서 "과연 마에다 미츠요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엘리오의 투지야말로 일본 무사의 거울이다. 경기는 내가 이겼으나 승부에 대한 집념에서는 패배했다."라고 한 바 있습니다.

 (이 시합이 와전되어 기무라와 엘리오가 3시간이나 싸웠다느니, 기무라가 엘리오를 백번을 메쳤는데 엘리오가 버텼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게 되었습니다. 실제 시합시간은 13분이었고 시합 내용 자체로는 엘리오가 기무라에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1. 유도의 귀신-기무라 마사히코


"기무라 전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후에 기무라 없다!"


1917년 9월 10일에 태어난 기무라 마사히코는  강을 끼고 있는 구마모토 현의 광산 마을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물속에 발을 담그고 돌멩이와 모래들을 퍼서 나르는 일을 하였다고 하죠. 물속에 하체를 담그고 하루 종일 있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단련이 됩니다. 물의 흐름을 계속 버티면서 허리와 다리가 자연스럽게 강해지죠. 또한 계속에서 돌멩이와 모래가 든 자루와 채를 손에 쥐고 날랐기 때문에 기무라의 악력이라는 것은 유도를 배우기 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구마모토 출신들이 술을 잘하고 힘이 장사라고 하죠.

기무라 마사히코

 10세때 강도관에 입문한 기무라는 엄청난 트레이닝으로 원래 강했던 팔힘과 악력을 거의 사기 수준으로 끌어올리게 되는데요. 자전거 타이어를 이용한 트레이닝이 보급되지 않던 시절 나무에 흰띠를 묶어놓고 메치기 연습을 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트레이닝법이었는데요, 기무라가 끊어먹은 도복띠는 강도관 시절에만 무려 1000개에 달한다고 합니다.(유도를 해 보신 분들이면 다 아시겠지만 유도의 도복띠는 어지간해가지고는 튿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배밀기(유도식의 팔굽혀펴기)를 한 번에 1000회씩 할 정도의 팔힘과 지구력을 키웠습니다.

 (방학기씨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를 보면 기무라가 달려오는 말을 메치는 일화가 나옵니다만, 이것은 아무래도 과장인 듯 합니다. 일본 측의 어떤 자료에도 그런 언급은 전혀 없거든요. 그리고 전성기의 기무라라면 그게 가능할런지도 모르지만 소년시절에 달려오는 말의 앞발을 잡고 메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죠, 중심이동이나 움직임 등이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른 네발달린 짐승을 던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입니다^^)

  중학 4학년(지금의 고1)때 강도관 4단을 취득,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승단 기록을 세우게 되는 기무라는 이후 시합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 17세의 나이로 전일본 대회 최연소 우승 1935에서 1937년까지 전 일본 유도대회 3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 13년동안 1950년까지 무패, 10연속 우승이라는 깨지지 않을 대기록을 세우게 되죠(물론 무승부 기록은 있습니다.) 결국 기무라는 당시 히트하던 소설 스가타 산시로의 붐과 함께 재조명되기 시작한 산시로의 실제 모델인 강도관 사상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의 뒤를 잇는 '쇼와의 산시로'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기무라 전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후에 기무라 없다!'는 말은 이 기무라를 당시 사람들이 사이고 시로와 동급으로 인정해 줬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사이고 전에 야마아라시 없고, 사이고 후에 야마아라시 없다!'라는 말에 빗대어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이고 편을 읽으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사이고 시로는 강도관 122년 역사상 최강이라고 불리는 남자입니다. 그와 견줄만 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기무라야말로 천재중의 천재였다는 것이죠.

 (흔히들 김두한 씨의 일대기에 꼭 등장하는 마루오카와 기무라를 비교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마루오카는 체중 자체도 경량급이었고, 지명도에서도 기무라 마사히코하고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원래의 유도 시합이라는 것은 당시에는 체급이라는 것이 없고 무차별급으로 진행되었지만 어전시합에 한해서 경량급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루오카는 그 부문에서 우승했던 것이죠.(사실 이 어전시합조차도 불분명합니다.) 방학기씨의 만화에는 이 마루오카가 유도8단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나이에 8단이라면 그건 대기록입니다. 당시 강도관에서 40대가 되기전에 8단 취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무라나 사이고 시로도 하지 못한 일이죠. 한마디로 무척이나 과장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방학기씨가 만화를 그릴때 김두한씨가 생전에 라디오 프로에서 했던 증언을 자료로 참고해서 그렸기 때문에 틀린 부분이 너무 많이 나온 것이죠.-그 라디오 방송의 증언들이 허풍과 과장이 너무 심했다는 것은 김두한씨와 같이 건달 생활을 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한 내용입니다.-장군의 아들 같은 영화를 보면 마루오카는 장신에다가 거구인 것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현역시절 170에 70킬로도 되지 않는 경량급이었습니다. 8단이라는 것도 당연히 거짓말이죠. 물론 마루오카가 그리 이름난 선수가 아니다 보니 정확한 단수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기무라나 아베 켄시로 같은 무적의 강자들이 버티고 있는데 혼자 8단까지 올라갈 수는 없었죠. 당시 일본 경시청 유도 지도 총감의 단수가 8단이었습니다.  

 일개 경찰서의 무술 지도 경부가 8단이라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이죠. 물론 이 마루오카 경부의 유도 실력은 비록 경량급이라도 어전 시합에서 우승을 할 정도이니 굉장하기는 했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나가 떨어진 당시의 건달이나 야쿠자는 꽤 많았다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스스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종로의 건달들이 강하다는 것이 일본까지 정평이 나서 마루오카를 특별히 불러왔다느니, 마루오카가 어전시합 무제한급을 7연패를 했다느니 하는 과장과 헛소문을 퍼뜨린 듯 합니다.-무엇보다 공식적인 어전시합인 무차별급에서 마루오카라는 우승자는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 당시 우승자라고 올라있는 이름은 아베 켄시로와 기무라뿐이죠. 야인시대나 김두한씨의 팬 분들은 이 부분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품으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사실대로 쓴 것 뿐입니다. 저도 어린시절엔 김두한씨의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다 믿었었거든요. 그게 엄청난 과장과 허풍이 섞였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는 거의 10년이 걸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지요.)

 기무라의 최종 단수는 강도관 7단이었는데 이는 기무라가 1950년에 강도관을 탈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규정도 그렇지만 당시 강도관 규정에도 특별 승급이라는 것이 있어서 7단 정도까지는 별도의 승단 심사 없이 어전 시합 우승만으로 승급이 가능하였고, 기무라는 바로 그런 케이스로 올라간 것이었죠. 정상적인 승단 심사를 통한 것이었다면 33세때 7단이라는 건 말이 안될 정도의 단수 입니다.^^;; 물론 당시 7단이건 8단이건 기무라를 이길 사람은 없었겠지만 말이죠. 우리나라 유도도 올림픽 우승하면 자동으로 단수를 올려주는 특별승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올림픽 우승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정식 승단을 하더라도 4단이나 5단 정도는 어렵지 않게 딸 듯 합니다만...

 

2. 기무라를 패퇴시킨 사나이!-아베 켄시로


기무라는 16세의 나이에 어전 시합에 최초로 참가하여 승승장구, 4강까지 진출합니다. 당시 기무라의 위력앞에 이름난 유도가들이 하나하나 다 나가떨어졌었는데 그를 지켜보던 가노 지고로 조차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고 하니 당시 기무라의 위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4강에서 만난 상대는 아베 켄시로. 그는 당대 최강이라고 평가받던 유도가로써 168의 키에 71킬로. 경량급에 나가야 할 체중이었지만 워낙에 강자였기 때문에 무차별급에 출전하게 된 것이었죠.(체격은 마루오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실력은 천지차이였던 듯 합니다.)

 기무라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밧다리 후리기를 하면서 한팔 업어치기를 할 요량으로 아베 켄시로에게 달려들지만 되려 아시바리(와사바리라고도 부르죠 우리나라에서는^^)를 당해 쓰러지면서 절반을 빼앗깁니다.(당시에는 절반 그리고 한판 두가지 뿐이었습니다. 그냥 밀려 넘어지는 그런건 점수로 인정도 안해 주던 시절이었죠.) 생전 처음으로 아시바리에 넘어져 본 기무라는 자존심이 상해 다시 달려드는 순간 자신의 복숭아 뼈 밑으로 아베의 발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다음 순간 기무라는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고수의 아시바리를 당하게 되면 원래 머리부터 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안당해 봐서 모르겠습니다만(저는 도장에서 초고수한테 당한게 아니라서 그런가 봅니다^^)

 결국 아시바리 두방에 한판으로 무릎을 꿇게 된 것이죠. 이 대회 우승을 마지막으로 아베는 어전대회에 참가하지 않게 됩니다. 기무라에겐 가장 깨끗히 패해버린 시합이 되고 말았죠. 리벤지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아베 켄시로에게 패퇴했던 경험은 기무라에겐 엄청난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한팔 업어치기의 연습에 주력하던 기무라는 이 일을 계기로 한가지 수련을 더 하게 되는데 바로 100개의 촛불을 켜고 발뒤축 후리기를 연습하여 풍압만으로 불을 꺼버리는 연습을 하게 된 것이죠.

 

3. 기무라와 프로유도

 

정식적 명칭은 국제 유도 협회이고 쇼와 25년(1950년)에 우시지마 8단이 만든 것입니다. 이 또한 수많은 문헌에서 기무라가 창시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프로유도라는 것은 고류 유술에 존재하는 수많은 살수와 역관절 메치기 같은 위험천만한 기술들을 다 복원시켜 스포츠 유도가 아닌 격투전용 유도를 지향하는 상당히 실전적인 무도였다고 합니다.

 사실 역관절 메치기같은 경우는 조금만 잘못해도 팔의 관절이 부러져버리는 것이 다반사이며, 낙법도 무척 까다로와서 메쳐지면 실신하거나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의 유도에서는 사라져 버렸지만 삼보에 아직 그 원형이 남아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삼보자료를 뒤져보시면 될 듯 합니다. 브라질리언 유술에도 역관절이 조금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역관절에 관한한 삼보쪽이 보다 더 체계가 있죠.(아무래도 엘리오나 카를로스 본인들이 메치기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물론 역관절 기술들에 관해서는 대동류와 아이키도가 가장 우수하기는 합니다만...

 손가락 관절기는 제대로 된 합기도를 조금만 익혀 보신 분들은 그 원리를 금방 아실 겁니다. 사실 손가락은 굉장히 민감하며 힘도 별로 없어 주먹으로 꽉 움켜 쥐기만 해도 기술의 반은 걸렸다고 할만큼 쉽게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역시 손가락이 부러지거나 불구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유도에서 금한 기술입니다.

 기무라는 강도관의 분위기가 너무 무도보다는 스포츠 쪽으로 기우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스스로는 연습때마다 살벌할 정도의 기술을 남발해, 그의 기술을 받아주는 사람들이 꼭 한 두명은 실신을 했다고 합니다. 하루에 100명과 대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기무라는 이처럼 기술을 너무 세게 걸었기 때문에 강도관에서도 평가가 썩 좋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그에게 요시지마8단의 프로 유도는 그의 무도 정신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었고, 기무라는 요시지마의 수제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손가락 관절기까지 다 부활시켜버린 프로유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레이시 유술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이 프로 유도는 최영의 선생님의 실전공수처럼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 전통 유도계의 압박에 의해 겨우 10회의 시합을 갖고 4개월만에 하와이에서 소멸하고 맙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기무라는 프로레슬링을 하기로 결심, 브라질 순방에 나서고 거기서 엘리오와 맞서게 됩니다.

기무라 마사히코


4. 최영의와 기무라, 두 초인의 만남.

 

기무라 마사히코님의 일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당대 최강의 무도가 최영의님이시죠. 최영의님이 미국 순방에서 돌아와서 전통 무도계의 온갖 시기와 중상 모략때문에 고뇌하던 시절, 기무라 마사히코와 만나게 됩니다. 기무라 또한 프로 유도를 하는 바람에 강도관 유도계 인사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공격을 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하죠. 만나자 마자 둘은 십년지기처럼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그러나 한가지 실망스러운 점은 이 둘의 대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인데요, 솔직히 상당히 궁금하기는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최강자라고 인정해주는 사이였으니 말이죠. 기무라선생의 성격또한 최영의님 만큼이나 괴짜스러운 부분이 있어 아무하고나 친해지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두분은 마음이 잘 맞았다고 합니다. 최영의님은 자신이 직접 쓴 글에서 이렇게 언급하신 일이 있습니다. 뭐 바람의 파이터나 공수 바보일대에서는 둘이 대결한 적이있는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으나...뭐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두분이 겨룬 일이 있는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최영의님도 기무라님도 아무도 그런 언급을 하신 일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죠.

"기무라야말로 최강의 유도가이고 진정한 무도인이었다. 그는 나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나보다 더 많이 단련하고 정진하는 내가 아는한도내에서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요즘의(당시, 1960년대) 일본 유도계는 네덜란드의 헤싱크(헤이싱이라고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5단에게 무릎을 꿇고 있다. 그러나...기무라 마사히코가 돌아온다면 헤싱크 따위는 그의 도복도 잡아보지 못할 것이며 3분을 버티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이것은 공수도인 최영의의 이름을 걸고 단언할 수 있다."

 최영의님과 함께 미국 순방을 떠나 사선을 함께 넘으며 우정을 다졌던 엔도 고키치 6단은 최영의님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나도 유도가이다보니, 기무라 마사히코라는 인간을 한 번 이겨보고 싶어서 5년이나 죽어라 연마했습니다. 기무라의 필살기라는 한팔 업어치기와 밧다리 후리기는 나의 필살기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5년동안 이를 갈면서 연마했지만 막상 기무라씨와 맞잡는 순간에 땅에 쳐박히고 말았지요...몇초도 버티지 못했었죠...."

 이후 최영의님과 기무라는 같이 유도도 수련을 했는데, 최영의님 또한 4년만에 강도관 4단을 취득한 유도의 달인이었기 때문에, 직접 유도 대련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아무리 천하의 최영의님이라고 해도 유도로는 기무라의 적수가 되지 않았죠. 맞잡는 순간에 한팔 업어치기로 깨끗히 날아가 버리셨다고 합니다.

그 때 하신 말씀이 유명합니다. "나를 이렇게 메쳐버린 인간은 기무라 마사히코 뿐이다."

 

5. 기무라와 역도산 그리고 최영의...당대 최강의 남자들이 만나다!...그러나...

엘리오 그레이시를 격침시키고 일본 유도의 강함을 증명한 기무라, 그러나 일본에서 그를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관심조차 기울여 주지 않았죠. 훗날 그레이시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그레이시를 격파한 사나이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이 때만해도 그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외국가서 허접한 유술가 하나 잠재우고 온 것이라고 여겼고, 더군다나 귀신 기무라가 패한다는건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쇼와29년(1954년)에 역도산님과 함께 드디어 테그팀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프로레슬링 시합을 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싸운 상대는 바로 유명한 샤프 형제였죠. 샤프형제와의 시합을 구경하던 최영의님은 역도산과 기무라에 대해 엄청나게 실망을 하시게 됩니다. 최영의님이 미국에서 목숨을 걸어가며 싸웠던 톰 라이스가 하던 것과같은 실전형 레슬링이 아니라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마찬가지인 경기였기 때문이죠. 게다가 기무라는 아예 무시당하는 역이고 오로지 역도산님만을 띄워주는 각본 또한 최영의님을 화나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쇼의 들러리나 서 주고 있는 기무라님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역도산 선생은 익히 알려진대로 미국에서 톰 라이스와 진검승부를 하다가-사실은 각본이 있었으나 톰 라이스가 무시하고 시작하자마자 달려들었죠. 역도산님이 이기는 각본이었기 때문에 훗날 역도산vs기무라 전에서의 기무라처럼 일부러 맞아주거나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처음에는 역도산님도 그와 제법 접전을 벌이셨지만 잠시후에 거의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고 중상을 입으신 바가 있습니다. 톰 라이스는 원래 세계 챔피언까지 노리던 복싱계의 강자였죠, 모션이 크고 궤도가 단조로운 가라데 촙은 그의 가드와 풋웤에 완전히 무력했습니다.

최영의 선생이 이후에 톰 라이스와 격돌, 늑골과 턱뼈를 날려 버리면서 톰 라이스의 격투인생은 그걸로 끝나게 됩니다만,  이 또한 역도산님에게는 치욕스러웠던 듯 합니다. 그러나 최영의님은 역도산님이 보기엔 너무나 강했고, 또한 너무 완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기무라 선생처럼 뒷 공작을 할 약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죠. 때문에 실제로 진검 대결을 벌이지 못할 바엔 또 다른 최강자인 기무라 선생을 눌러 버리는 것이 났다는 판단을 하셨던 듯 합니다. 최선생님이 프로레슬링을 할 리가 없으니 가난한 기무라선생을 끌어들이고, 자신의 각본 속에서 '기무라는 역도산보다 못하다'라는 인식을 일본인들에게 심어주게 된 것이죠.)

 그리고 최영의님은 기무라를 설득, 결국 기무라 마사히코와 역도산의 진검 승부가 결정이 나게 됩니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이 시합을 '간류지마의 결투'라 하여 엄청난 관심을 보였는데요, 간류지마의 결투라는 건 바로 사상 최강의 사무라이라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또 다른 검의 귀신 사사키 고지로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즉 최강은 둘이 될 수 없고, 이 둘은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에 비견할만하다는 의미였던 것이죠.

 최영의님이 이후에 기술한 자서전을 보면 당시의 역도산님이나 기무라님 모두 엄청나게 강했지만, 기무라님은 이미 나이가 마흔에 가까워 절정에 달한 젊은 역도산에 비해 불리한 감이 없지 않았다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실력만을 놓고 볼때 기무라님이 약간우위에 있었다고 판단하신 듯 합니다. 시합직전까지도 기무라님의 승리를 확신하셨다 합니다.

 

6. 제 2차 간류지마의 결투...그러나 고지로는 무사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인가?


 간류지마의 싸움에서 무사시가 온갖 심리전을 다 이용해서 승리를 따낸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검의 실력만이라면 고지로가 무사시보다 못할 것은 전혀 없었다고 하죠. 이 싸움은 무사시의 '검술'의 승리가 아니라 '병법'의 승리였다고 알려지게 됩니다. 기무라와 역도산의 시합 또한 역도산이 쳐 놓은 그물에 기무라가 걸려든 꼴이었습니다. 당시의 동영상을 보면 가무라가 역도산에게 맞는 순간에 무방비로 있다가 어이없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 할 수있습니다. 그리고 뭔가 억울해하는 기무라의 모습도 확인이 가능하죠. 

 훗날 말년의 기무라가 토크쇼에 출연해 당시의 사정에 대해 언급한 바 있었고, 그 내용은 최영의님의 자서전과 바람의 파이터, 공수 바보일대 등에 나왔던 내용과 거의 일치하므로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일본 만화중 베스트 셀러로 꼽히는 공수 바보일대에서 기무라가 병든 아내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역도산에게 져 줘야만 했던 서글픈 사연이 나오고, 그 이후 역도산님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이 그대로 기술되었을 때 역도산님의 수제자였던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김일-오오키 긴타로, 이 세명의 프로레슬링의 거목들이 아무런 반론도 내 놓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부분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공수 바보일대의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바람의 파이터와 똑 같습니다. 최영의님의 자서전과도 일치하죠^^

 실제로 최영의님이 당시 실신한 기무라님을 보면서 격분한 나머지 역도산님에게 죽여버리겠다고 호통을 치신 일은 꽤 유명합니다. 이후 역도산님이 최영의님을 겁내서 피해다닌 것도 다 사실인 듯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역도산님이 이 무렵에 야쿠자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며 술에 빠져 사실 때, 역도산님의 뒤를 봐주던 양원석-야나가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이라는 조선계 야쿠자의 존재입니다. 보통 알려진 내용은 역도산님이 워낙에 싸움에도 강했기 때문에 아무리 행패를 부려도 야쿠자들이 그냥 맞아주고 자리를 피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죠.-야쿠자들이라면 정 안되면 떼거지로 달려들어 칼로 난도질을 해 버릴 수 도 있고, 총을 쏠 수도 있습니다. 단지 싸움에 질 것 같다는 이유로 역도산님을 피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가 않습니다.- 이 야나가와라는 인물은 일본에서는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초과격 무투파 야쿠자의 두목으로써 10명도 안되는 조직원을 이끌고 120명이 넘는 야쿠자 조직을 피를 피로 씻는 싸움으로 단 하루만에 쓸어버리면서 전 일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갔던 무시무시한 남자였습니다. 맨손 뿐 아니라 무기의 사용에 능하고 기습에 능해 한번 붙었다 하면 반드시 바닥을 피로 칠해야 싸움을 끝냈다고 할 정도였으며 당시 야쿠자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라고 불릴 정도의 야쿠자였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역도산의 뒤를 봐 주고 있었던 것이죠. 때문에 야쿠자들이 감히 역도산님을 죽일 생각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히기만 하면 꿈틀하는 법이죠...

  훗날 최영의님의 이 역도산님에 대한 행동에 반감을 품은 김일 선수가 최영의님에게 도전을 하였지만, 김일님은 최영의님에게 도전할만한 자격이 안되었죠. 프로레슬링에서도 최고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이노키와 바바를 제압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최영의님에 대한 도전은 아무도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결국은 김일님도 도전한다고 엄포만 놓았을 뿐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고 맙니다. 사실, 김일 선생이 도전하실 때의 정황을 고려해 보면 정말 도전하실 생각이었다면 조일삼형제분이나 로야마님, 사토 카츠아키님같은 당시 극진의 간판을 짊어진 사범님들들을 먼저 쓰러뜨려서 최영의님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드셨어야했겠죠. 그 정도 단계는 거쳐야 둘의 인지도 차이를 메꿀 수 있었을테니까요. 일본에서는 세계 최강의 초인이자 무신으로까지 칭송받는 분에게 도전하는 일인데 아무리 프로레슬링 테그 챔피언이라고 하더라도 그 격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실 역도산님 측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지만(죽은 자는 말이 없죠) 여러가지 정황을 감안하면 최영의님의 말씀이 옳은 듯 합니다.

 

기무라 마사히코


7.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스스로 꺾어버린 무도가의 자존심...그리고 은퇴...

기무라 마사히코는 결국 이 석연치 않은 사건으로 프로레슬링을 그만두고 개인도장을 운영하며 실전에서는 손을 떼게 됩니다. 기무라가 그렇게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던 자신의 무도가로써의 명예를 팽개쳐 가며 지키려고 했던 아내는 기무라의 정성 덕택인지 병세가 호전되어 기무라의 곁을 지켜주게 되었습니다.(솔직히 저라고 해도 기무라 선생의 입장이었다면 두말않고 역도산님의 각본대로 놀아나 주었을 것 같습니다. 명예도 중요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니까요.)

  사실 기무라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가족의 사랑이라는 것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얻게된 아내는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가족이었고 쉼터였습니다. 아내또한 기무라를 지극 정성으로 내조해 줬었고 깊이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아내가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기무라 선생이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죠. 자신의 명예, 귀신이라는 칭호...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입니다. 역도산님이 3번의 매치를 제의하면서 2번은 짜고하고 마지막은 진검승부라고 했을 때 기무라님은 이미 시합이 한 번으로 끝날 것이라는 각오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무도 인생의 끝이 될 것이라는 것도 어느정도 예상했다고 하죠. 다만, 역도산님의 무도인으로써의 자존심에 실날같은 희망을 걸고 그에 응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그러나 결과는 기무라 선생의 추측대로 진행이 되고 말았죠. 훗날 기무라 선생은 인터뷰에서 그 때의 일은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유일한 가족인 사랑하는 아내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은퇴후의 기무라 선생의 얼굴에는 뭐지 모를 평안함과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프로레슬링시절의 그 찌들고 무기력한 모습은 사라져 버렸죠. 무도는 기무라 선생에게 아무런 영광도 주지 않았습니다. 귀신을 굴복시킬 정도라던 유도솜씨도 남의 책략에 들러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에게 프로레슬링은 각본이 있는 것이라는 것이 알려진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이에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인들도 '그러면 그렇지, 진검승부라면 프로레슬링 최강자가 아니라  상대가 전세계의 누구라고 할지라도 천하무적 기무라가 그렇게 질 리가 없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뭐 정작 기무라 선생 본인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는 태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도산님이 톰 라이스를 일본으로 데려와 일방적인 구타끝에 승리를 하게 되지만 이는 오히려 그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톰 라이스는 최영의님에게 패배하면서 최선생의 해머같은 정권에 이미 격투가로써의 인생은  끝나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싸울 수 없는 톰 라이스는 돈 때문에 일본까지 오게 된 것이었고 역도산님은 이를 이용, 일본인들 앞에서 그를 이겨버립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의 관중들에게 각본이나 쇼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음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톰 라이스는 처음부터 누가보기에도 전의조차 없었던 것이죠. 정말 명예 회복을 하고 싶었다면 자신을 참패시킨 톰 라이스를 그 지경으로 만든 최영의님에게 도전을 했었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8. 그레이시와 함께 되살아난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
.

 

그레이시 패밀리의 발레투도가 세계를 휩쓸게 되자, 이 그레이시를 일찌감치 격파해 버렸던 기무라 마사히코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무라 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다만 그 당시에 엘리오를 이기는 필름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서 사람들은 기무라를 역도산에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패배한 힘없는 유도가가 아닌 진정한 최강의 유도고수로 다시한번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쿠라바 카즈시라는 뛰어난 그래플러가 그레이시 패밀리를 기무라 록으로 격침 시키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기무라에 대한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사쿠라바가 호이스를 쓰러뜨린 다음날 신문에는 '사쿠라바, 일본 격투계 50여년만의 비원성취'라는 기사가 1면 톱으로 실리게 됩니다. 바로 엘리오가 기무라에게 무릎을 꿇은지 50여년이 지났기 때문이죠. 그리고 공개된 필름 속의 기무라는 역도산님과의 시합에서 무기력하게 실신해버린 삶에 찌들어버린 모습이 아니라 그 막강한 그레이시 유술을 일방적으로 부수는 가공할 실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강자의 모습으로 말이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SS에 추가 포스팅이 유익하셨다면 [↑추천]을, [구독]을 원하시면 구독+ 를 눌러 주세요.
이메일로 구독
Posted by 은빛늑대(天狼)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