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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레이시(브라질) 유술 주짓수의 창시자 콘데코마 마에다 미츠요
    무림 객잔/무예 이야기 2011. 5. 12.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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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데코마(Conde Koma) 마에다 미츠요


    1. 마에다 히데요-전설의 시작.

    콘데코마_마에다 미츠요 1



    마에다 미츠요는 아오모리 현 출신이었습니다. 본명은 마에다 히데요였고, 강도관 입문후에 마에다 미츠요로 개명합니다. 유도의 본관인 강도관이 창립되기 2년전인 1880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1878년이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습니다.) 강도관의 창립자이자 유도의 창시자였던 가노 지고로와는 21살 차이죠^^ 아버지는 스모 선수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죠. 비록 마에다 히데요의 체격은 작았으나 힘만큼은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장사였다고 합니다.

     

    사실 그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거의 없습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자료라는 게 별로 확실치 않습니다. (만화책 '콘데 코마' 때문에 그의 일대기가 꽤 잘못 알려지게 되었는데요, 사실 그 만화의 60%는 픽션이라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뭐 예를 들자면 양심류의 사무라이에게 양심류 유술을 배워 가노 지고로에게 복수를 하러 간다든가 하는 그런 내용 말이죠. 그런데 어떤 글에서는 이것이 정설인냥 설명을 하는 것을 봤는데 이것은 만화와 현실을 혼동한 것에서 오는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실제 마에다는 가노에겐 굉장히 공손한 제자였다고 합니다. 만화책에서의 가노에게 허구헌날 시비거는 그런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것이죠. 또한  앞서 설명 드렸듯 가노 지고로와 마에다는 21살이나 차이가 납니다. 게다가 강도관의 최강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사이고 시로요코야마 사쿠지로였죠, 가노는 마에다의 전성기에 40이 넘어서 이미 싸움을 받아줄 나이는 아니었던 것이죠.
    특히 미국에서의 싸움 내용등은 다 픽션입니다.^^;; 마지막 상대로 등장하는 전설의 실전 프로레슬러 프랭크 고츠-최영의님이 직접 언급한 바 있는 강자중의 강자였죠.-와는 대결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한가지 더 아쉬운 점은 이 콘데 코마의 번역을 담당하신 분이 강도관의 상황이나 그런 부분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으셨던 것 같다는 점입니다.
    사천왕중 한사람인 야마시타 요시카즈-혹은 요시츠쿠라고도 합니다.-를 야마시타 기쇼라고 번역을 해 두었고 토미다 츠네지로의 이름을 토미다 헤이시로라고 번역해 뒀는데, 이는 일어식 이름을 잘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모 스포츠 신문에 나왔던 마에다 미츠요에 대한 글에도 야마시타 기쇼라는 이름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글 쓰신 분이 만화책의 자료를 너무 믿으신 듯 합니다. 근데 지금은 어찌된 일인지 그 이종격투기 칼럼이 사라져 버렸더군요.)

     

    콘데코마 만화책 1

    확실한 것은 마에다 미츠요는 양심류 유술을 어릴때 배웠다는 것인데요, 이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게, 그 당시에는 강도관 유도가 아니라면 도츠카 양심류가 거의 모든 유술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입니다. 자연스럽게 양심류 유술을 익히게 된 것이죠. 그러나 양심류와 그의 분파들...예를들면 양이심두류같은 유파들은 타 유파의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기술만 고집하는 폐쇄적인 성향이 있었습니다. 필요한 것이라면 오키나와의 가라데까지 받아들이려 했던 가노 지고로의 강도관에 지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운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마에다가 강도관에 입문할 무렵(1897년)에는 1890년에 열린 강도관 vs 양심류의 경찰청 유술대회에서 요코야마와 사이고의 활약으로 양심류가 패배하면서 이미 양심류 유술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가는 처지였습니다. 마에다 미츠요는 작은키(165라고 하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보이고, 160이 안되는 키였다는게 정확한 자료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에서 165라면 표준보다 큰 키입니다. 일본에서 작다고 소문날 리가 없는 것이죠.)에도 불구하고 천부적인 자질로 강도관에서 4단을 획득합니다. 지금의 브라질 유술의 승단 난이도와 이 당시의 강도관의 유도 승단 난이도는 비슷했으므로 20세도 안된 나이에 4단이라는 것은 엄청난 실력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2. 강도관 4천왕과 마에다 미츠요.

     

    다른 쪽 자료에서는 마치 이 4천왕과 마에다가 다 함께 강도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사천왕의 이름도 틀렸더군요. 우선 4천왕을 알아보면 사이고 시로, 요코야마 사쿠지로, 야마다 츠네지로, 야마시타 요시카즈(루즈벨트의 유도사범, 사천왕중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강도관을 지키며 10단을 추증받은 인물이며 가노 지고로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입니다.) 인데, 야마다는 이후 토미다가의 양자가 되어 토미다 츠네지로로 개명하게 됩니다.  토미다 츠네지로의 아들인 토미다 츠네오는 바로 그 유명한 유도소설 '스가타 산시로'(강도관 역사상 최강의 사나이이자 위의 사천왕 중 일원이었던 사이고 시로를 모티브로 만든 소설)의 저자입니다.

     

    특히 이 중에서 단연 강자라고 불리던 사이고 시로의 경우 강도관을 일본 최강의 무도관으로 키운 장본인으로써 수많은 타류시합에 단한번의 패배도 없었고, 그 누구도 메칠 수 없었던 엄청난 균형감각의 소유자였습니다.
    가노 지고로 또한 자신의 글에서 "사이고 시로는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고, 그의

    콘데코마_만화책 2

    메치기는 극한까지 이르렀다."고 극찬을 했었죠. 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중국으로 가 버린 것이죠(중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다는 설도 유력합니다.) 그가 가노 지고로에게 남긴 '지나 도항 의견서'는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마에다가 입관할 무렵엔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죠.
    그러나 마에다 미츠요의 생김새나 성격 등이 사이고와 너무 흡사해서 다른 관원들이 신기해 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콘데 코마를 보면 마에다 미츠요가 사이고 시로의 야마아라시를 구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 또한 픽션입니다. 강도관 역사상 야마아라시를 구사한 사람은 사이고 뿐이었습니다. 이후의 유도가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에다는 이후 이 사천왕중 한 사람인 토미다 츠네지로와 함께 190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미국 최고의 명문 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에서 둘이 시범을 보였는데, 그 학교의 정식 종목이던 레슬링을 하는 사람들과 겨루게 되었습니다. 마에다가 승리하자 토미다도 도전을 받았는데, 본래부터 강도관 4천왕중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던 사람인데다가 나이까지 40줄에 있어서 레슬링 선수에게 제압당하고 맙니다. 이에 다시 마에다가 나서 그를 쓰러뜨렸다고 하죠. 이후 마에다와 토미다는 헤어져서 각자 유도를 가르치러 다니게 되는데 프린스턴 대학에서 잠시 강의를 했다고 합니다만, 워낙에 궁색한 생활을 하게 되고 보다 강한자와 싸워보겠다는 스스로의 결심을 지키기 위해 스트리트 파이트로 뛰어듭니다.

     

    3. 뉴욕등 미국에서의 스트리트 파이트

     

    흔히들 이 까페에서 하는 논쟁 중에 실전과 무도라는 것이 있는데, 마에다 미츠요는 이 실전이라는 것을 무척 중요시 여겨, 날짜를 잡고 싸우거나 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합니다. 특히 당시의 갱들과도 마찰이 잦았는데 마에다는 그들과 싸울 일이 있으면 그자리서 두들겨 패고, 밥먹다가도 나가서 싸우고, 길가다가 싸우고...하루에 두세번 싸운 일도 예사였다 하며 상대방들은 칼이나 병을 기본으로 들었다고 하죠. 당시의 미국의 치안 상태는 극도로 나쁜 때였고(갱스 오브 뉴욕이라는 영화를 생각하시면 될 듯, 물론 마에다가 건너간 것은 그보다

    40년 정도가 더 지난 상황이었지만 1차 대전 전의 미국의 치안 상황은 남북 전쟁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죠.) 그런 곳에서 싸움을 계속했으니 마에다 미츠요의 배짱도 알아줘야 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권총 세례를 받은 일도 여러차례 있었다고 합니다.(콘데 코마 만화책에 나오던 이기면 1000달러라는 간판은 실제로 걸고 다녔다고 합니다.)  결국 미국에서 2000회에 이르는 스트리트 파이트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미국에는 더 이상 적수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요즘같이 치안이 좋은 시대라 하더라도 "I'm Maeda Mitsuyo, You can get 1000$ by defeating me!" 이런 간판 달고 다니려면 보통 배짱으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입니다. 이 때 마에다는 이 문구를 달고 뉴욕을 활보했다고 하죠. 그러나 처음에는 마구잡이로 달려들던 미국인들도 마에다의 무시무시한 싸움실력과 총알이 날아와도 달려드는 배짱에 기가 질려서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딜가나 무서운 인간은 존재하기 마련이죠. 바로 미국 최고의 괴력을 자랑하던 부쳐 보이의 존재였습니다. 아무런 기술도 없이 오로지 힘만으로 미국 전역을 굴복시켰던 스트리트 파이트의 최강자였죠. 이름나 복서이건 레슬러이건 이 남자 앞에서는 앞도적인 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만화 콘데 코마에서는 이 부쳐보이가 무슨 택견을 쓰니 복싱의 강자였다느니 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작가는 태권도과 택견의 기원상의 차이조차 제대로 인식 못하는 오류를 범해 이 만화의 작품가치를 더욱 떨어뜨리고 맙니다.)

     

    막상 시합이 정해지자 뉴욕 전체가 떠들썩 해지게 되었는데요, 아무도 마에다의 승리를 점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쳐보이를 이기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190이 넘어가는 부쳐보이를 160도 안되는 마에다가 무슨 수로 이길 수 있을런지도 의문이었습니다. 강도관 미국 총 책임자였던 토미다 츠네지로만이 마에다가 충분히 이길 것으로 판단했다고 합니다.

     

    시합링 위에서 스트리트 파이트가 아닌 레슬링 룰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넘어뜨리는 거라면 제아무리  미국에서는 힘이 천하장사라도 유도의 달인인 마에다 앞에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죠. 순식간에 바닥에 몇번이나 패대기 쳐 진 부쳐보이는 결국 다 필요없다며 스트리트 파이트로 달려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거구가 공중에 160도 안되는 사나이에게 붕떠서 나가 떨어지는 장면은 미국인들에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 순간에 이미 부쳐보이는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결국 이 시합은 싸움으로 변해 버리고 마에다는 이것이야말로 기다리던 것이었죠. 가능하면 유도룰이나 레슬링 룰로 싸워달라는 토미다의 부탁 때문에 마지못해 레슬링 룰로 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스트리트 파이트가 하고 싶었던 것이죠. 순식간에 부쳐보이에게 플라잉 암바를 걸어 그 자리서 게임을 끝내버리고 맙니다. 이 싸움을 통해 유도의 강함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고, 훗날 루즈벨트 대통령까지 야마시타 요시카즈 선생에게 유도를 개인지도 받게 됩니다.

     

    4. 본격적인 이종격투와 마에다 스타일의 확립.


    (주: 마에다 미츠요와 가장 유사한 스타일의 격투가 힉슨 그레이시. 도복에는 일어로 적힌 힉슨 그레이시라는 글자가 눈에 띄죠. 힉슨은 스스로를 콘데 코마의 유지를 받드는 사무라이라고 늘상 강조하곤 합니다.)
     

    콘데코마_마에다 미츠요 2

    힉슨의 경기 모습을 보면 그의 아버지 엘리오와는 완전히 다른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엘리오의 판박이에 가까운 호이스와 비교해보면 간단합니다. 엘리오도 인터뷰에서 "힉슨보다는 호이스가 나의 유술과 닮은 것을 구사한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힉슨이 호이스보다 유술실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마에다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원래부터 힘이 장사였던 마에다 미츠요는 완력을 요하는 메치기나, 강력한 스탠딩 레슬링, 그리고 누르기 등에도 능했는데 엘리오는 워낙 기본 체력이 약했던 관계로 마에다가 전수한 기술의 반도 제대도 구사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대신, 자신이 구사할 수 있다고 판단된 기술만큼은 엄청나게 연마해서 수많은 시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만큼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도록 단련한 것이죠. 그러다보니 그의 유술 자체도 관절기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기술의 폭이 좁아지게 된 것이죠. 그러나 힉슨은 본으로만 존재하게 된 기술들 중 필요한 것을 다시 복원시켜 그의 기술로 만들었습니다. 기본체격과 힘에서 엘리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힉슨이었기에 마에다의 유술을 복원하면서 자신에 맞추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죠.

     

    이러한 이유로 마에다 미츠요의 플레이 스타일은 힉슨과 무척 유사했다고 하는데요, 발로 밟는 듯한 동작을 페인트로 넣고 치고 들어가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고 합니다. 그렇다곤 해도 기본적으로 그는 강도관 유도의 고수였고, 사이고에 이은 2대 최강자였기 때문에 메치기 실력도 굉장했다고 하죠. 때문에 공격 패턴도 변화무쌍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영국의 캐치 레슬링 대회에 참전하게 되는데, 도복을 입지 못하는 규정상 마에다는 결승에서 패배, 2번의 준우승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몇가지 싸움 패턴을 연마하는데 바로 도복이 없는 경우의 공격방식이죠, 낮은 테클 이후의 암바나 마운트 펀치 등을 연구하게 됩니다. 그레이시 패밀리의 공격 패턴은 마에다가 이 때 연구한 걸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엘리오는 마에다의 기술을 다 구사할정도로 튼튼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기술을 전수받았던 카를로스 그레이시와는 달리 테클에 이은 관절기만을 집중적으로 연마하게 됩니다.(물론 익히 알려진대로 엘리오는 어린 시절에 워낙에 허약해서 마에다에게 직접 유술을 전수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솔직히 엘리오의 전성기 시절 필름을 보더라도 메치기는 별로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 무렵에 마에다스스로 오픈 핑거 글러브를 고안해 냅니다. 상대를 보호하면서 관절기를 걸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글러브였죠. 그는 서로를 최소한의 룰로 싸우게 할 수 있는 발레투도를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고삼아 말씀 드리면 마에다의 타류 시합(무도인끼리 정식으로 날짜를 잡고 싸움) 전적은 1000전에 이릅니다. 캐치레슬링 결승에서의 2패를 제외하면 모두 이겼다고 합니다.

    (주: 오픈 핑거 글러브는 마에다 미츠요가 원조격)
     

     5. 코마 백작 등장

     

    콘데코마_마에다 미츠요 3

    본시 마에다 미츠요세계를 돌며 자신의 강함을 입증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08년에 이르게 된 곳이 바로 스페인인데, 스페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체구가 여타 유럽에 비해 작은 편이라 체격에 열등감이 많고 성격이 화끈해 체격을 극복할 수 있는 격투술에 관심이 많습니다.(이건 제가 직접 거기가서 생활하면서 느낀 점입니다. 특히 제가 있던 그 조그마한 동네에도 태권도 도장이 있었습니다. 성함은 기억이 안나지만 태권도8단이라고 하시더군요. 한국인 사범님들이 스페인에는 정말 많습니다. 여기저기 널린게 무술도장이구요.) 그래서인지 스페인에서 마에다의 주가는 폭등하게 됩니다. 마에다는 보통 거기서 코마루라는 이름을 썼는데, 이는 마에다 본인의 호탕한 성격 때문에 수입을 왕창 써 버리고 평소에는 궁하게 사는 패턴을 반복하다보니 툭하면 '코마루... 코마루(코마루는 일어로 궁하다는 뜻입니다.)' 라고 중얼거려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하죠. 그런데 코마루는 어감이 별로 좋지 않아, 마에다는 그냥 코마라고 고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연전연승하자 스페인인들이 그에게 격투기의 귀족이라는 의미에서 백작이라는 별명을 붙입니다. (Conde-정확한 발음은 꼰데 입니다-는 스페인어로 백작이라는 뜻입니다.)

     

    6. 브라질, 그리고 그레이시 패밀리


    (주: 마에다 미츠요가 제2의 고향을 꿈꾸던 아마존)
     

    1915년에 브라질 베렌이라는 곳에 마에다는 정착을 하게 됩니다. 1927년에 일본 기업들은 아마존의 토마사수라는 지역에 대규모 이민을 위한 도시를 건설하는데,  마에다 또한 중요한 인물로 끼어들게 됩니다. 미국과는 달리 브라질은 이주를 장려하고 있었고, 특히 아마존 정글에 대해서는 아예 개발 촉진을 위해 일본인들의 진출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마에다는 바로 이 아마존 정글에 제2의 일본을 건설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나 일본인들은 근본적으로 허약한 체질이었고, 마에다는 아마존의 말라리아의 무서움을 너무 간과했던 것이죠. 스스로는 강골이었기에 그런 점에 둔감했던 것일 수도 있구요.

     

     그 계획이 틀어지고 일본인의 이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많은 낙담을 하고 이주민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만을 하게됩니다. 그러면서 현지 유력인사들과도 친분을 쌓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카를로스 그레이시의 아버지 가스타우 그레이시였던 것이죠. 그레이시 가문은 원래 스코틀랜드에서 건너온 가스타우의 할아버지인 조지 그레이시가 그 시조라고 합니다.
    당시 스트리트 파이트 같은 걸로 여러가지 말썽을 부리던 장남 카를로스 그레이시를 그의 아버지 가스타우가 도장에 데려오면서 그레이시가문의 전설이 시작되게 됩니다.(힉슨의 아버지로 유명한 엘리오 그레이시는 11살이나 어린 동생이었습니다.)

     

    7. 왜 유술이라고 부르는가?

     

    글을 읽다보면 마에다는 유도가인데 왜 그레이시는 유술을 칭하게 되었는가? 하는 궁금증이 드실 수 있습니다. 강도관 유도는 강도관이 제 궤도에 오르게 되자 일체의 타류 시합을 금하게 됩니다. 마에다 미츠요는 그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스스로를 파문시켜 버린 것이죠. 그래서 유도라는 명칭을 스스로 봉하고 유술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그레이시의 유술은 일본 유술이 아니라 유술을 체계화한 유도에서 온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일본의 정통 유술에 있는 관절기보다 브라질 유술의 관절기가 더욱 다양하고 강력한 것이죠.

     

    어떤 글에는 브라질 유술에는 하체 관절기가 없다는 둥 엉뚱한 의견을 제시하면서 브라질 유술의 한계를 논하는 것을 봤는데, 그것은 브라질 유술의 기원을 잘 모르면서 비판을 하려다보니 생긴 일입니다. 일본의 고류 유술에는 물론 하체 관절기가 없지요. 그것은 전장에서 무사들이 하체 관절기를 썼다간 상대가 칼로 내리칠테니까요. 전장용 살상무도인 일본의 고류 유술에는 당연히 필요없는 기술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브라질 유술은 일본 고류 유술이 기원이 아니라 유도가 기원인 무도입니다. 엄밀히 말해 브라질 유도인 셈이죠. 스승인 가노 지고로와의 의리를 지키려는 마에다의 사정에 의해 명칭만 빌려썼을 뿐, 고류 유술의 브라질 변형판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유술의 체계화를 이룬 유도에선 이미 맨손 격투를 상정한 하체 관절기가 만들어져 있었다고 하죠. 제대로 본으로 정립된 것은 아닙니다만.(원래 유술 유파들 중에는 하체 관절기를 가지고 있었던 유파가 있기는 했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힐 훅같은 그런 고급적인 형태는 아닌 듯 합니다.) 또한 마에다캐치레슬링, 프로레슬링 등과의 대결을 통해 하체 관절기를 본격적으로 연마해서 체계화 시킵니다.(물론 이후에 레슬링 쪽의 하체 관절기도 도입되었다 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그레이시에게 전해졌지요. 브라질 유술에 하체 관절기가 없다는 주장은 브라질 유술에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콘데코마_마에다 미츠요 4

     

    8. 마에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오모리.

     

    40여년의 타지 생활 끝에 그는 두번의 결혼을 하고 브라질에서 노후를 보내게 됩니다.그러나 그의 생활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첫번째 아내였던 프랑스계 여성은 딸까지 낳았지만 그 딸이 2살 되는 해에 둘 다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44세 되던 때에 스코틀랜드 계의 여성과 재혼을 합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1940년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고 교통편까지 주선해 주었지만 마에다가 거절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돌아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는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마에다는 스스로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두번째 아내였던 스코틀랜드 계의 여인이 마에다가 자신을 버릴까봐 마에다의 일본행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당시 브라질 현지에서 타국인과 결혼한 일본인들이 일본에 가고나서는 돌아오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 했었다고 합니다.. 교통 사정도 무척 나쁘던 시절이고, 브라질이 그렇게 살기 쾌적한 곳도 아니었고 치안도 일본보다 훨씬 나빴죠. 무엇보다 워낙에 병약했던 아내였고, 마에다 또한 워낙에 깊이 사랑했는지라 그는 곁에 있어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일본행은 입 밖에도 내지 않고 평생을 보낸 것이죠. 남자중의 남자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스승 가노의 유도를 스트리트 파이트와 타류시합에 사용했던 자신에대한 죄책감도 한 몫 했을 수도 있을 것 같구요.)

     

    결국 마에다 미츠요 본인은 그의 고향 아오모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브라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인은 신장 질환이었다고 하는데, 브라질등의 남미쪽은 원래부터 수질이 썩 좋지 못합니다. 수도 시설과는 관계 없이 기본적으로 지하수나 강물의 수질이 우리나라의 것보다 많이 못한 편이죠. 특히 어린 시절을 남미에서 보내고 온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눈가에 주름이 굉장히 심합니다. 마에다 또한 이런 것들의 영향 탓인지 신장에 이상이 온 것이었죠.

     

    폭풍처럼 살아간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말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국의 물이 먹고 싶어..."

     

    결국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 고향인 아오모리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던 것이죠.

     

    그리고는 그의 제2의 고향 브라질 베렌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 후 50년, 마에다가 남긴 마지막 유산그레이시 일족은 최강의 무도집단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부록

     

    유술? 주짓수?

     

    먼저 주짓수라는 것에 대한 용어 정리부터 해야겠군요.

     

    주짓수란 엄밀히 말해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유술(柔術)의 원어 발음인 일어식으로는 쥬짓츠(츠와 츄의 중간 발음)가 됩니다. 이걸 마에다 미츠요가 영어(JIU-JITSU)로 표기한 걸 그냥 영어식으로 읽어 주짓수라고 읽은 것이죠.(처음 표기한 마에다와 읽는 카를로스 그레이시의 읽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이 유술이라는 무도는 일본의 것으로써 5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이걸 흔히
    고류 유술이라고도 하는데, 관절기, 차기, 지르기, 메치기 등 전장에서 쓸 수 있는 격투기술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고류 유술엔 힐훅이나 니바와 같은 관절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장에서는 쓸 수 없는 관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붙드는 순간에 칼에 찔려버릴테니까요.)

    이 고류 유술은 유파만해도 200개가 넘고 각자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도 고류 유술들이 등장했는데, 하체관절기가 나온 것이 옥의 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걸 주짓츄라고 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야와라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도 '야와라(일본어로 부드러울 '유'를 의미)'라는 이름의 무술로 들어왔는데 아직도 야와라 도장이 몇군데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합기도 유파중 절반 정도가 바로 이 야와라에서 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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