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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소룡과 최영의(최배달)에 대한 몇가지 오해
    무림 객잔/무예 이야기 2011. 5. 6.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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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사람들이 이소룡(브루스 리)과 최영의(최배달)에 대해 몇 가지 오해를 하는 점이 눈에 자주 띄어서 정보를 제공한다.


    < 1 > 이소룡에 대한 오해

    이소룡을 단순히 영화배우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영화배우이기 이전에 무술가였다. 무술이론에 해박했고 도장을 경영하며 여러 제자들을 키웠다. 그의 아내도 도장을 경영하며 만났다.
    그가 무술대회에서 시범연무를 하는 것이 눈에 띄어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여러 연예인, 유명인사들에게 무술지도를 했다.
    그러면서 영화스타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게 된 것이다.



    그는 여러 무술을 섭렵했으나 그가 특히 많이 배운 무술이 엽문 사부에게 배운 영춘권이며, 그 후 수많은 무술인들과 교류하며 여러 무술을 연구하고 노장철학을 중심으로 "절권도"라는 자신만의 무술철학을 창시했다.
    그의 절권도는 특정 무술문파라기보다는 하나의 무술철학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가 "준판쿵푸"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무술지도를 했고 나중에는 자신의 쿵푸에 "절권도"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의 절권도는 고정된 무술이 아니었다.

    그가 요절했기에 절권도의 발전과정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지만, 사실 이소룡은 말년에 그래플링 기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 결과는 마지막 작품인 "용쟁호투"에 나온다. 초반부에 짧은 팬츠만 입고 홍금보와 겨루기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이소룡이 보여주는 그래플링 기술은 이소룡의 절권도가 단순히 타격기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폭으로 발전하려 했음을 증명한다.

    또한 그의 미완성 유작인 "사망적유희"를 보면 압둘 자바와 대결하는 장면에서 끝내기 기술은 목 조르기이다. 이 또한 이소룡의 무술에 대한 연구가 어디까지 이르렀는가를 증명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압둘 자바를 목조르기로 끝내는 장면은 흡사 오늘날의 이종격투기 경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합기도 지한재 씨와의 격투씬도 유술가에게 어떤 식으로 대항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절권도식 해법이다. 절권도란 특정 대응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맞춘 최선의 대응방식을 지향하는 "도의 철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소룡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대니 이노산토 씨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절권도를 지도하는 공식자격을 이소룡에게 부여받은 대니 씨는 절권도에 대한 모순된 현상을 다음과 같이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다.

    "절권도가 어떤 특정한 기술체계나 유파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절권도 도장에 와서 어떤 기술들을 배우면 그게 곧 절권도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절권도란 어떤 고정된 형태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절권도는 각자가 자신의 무술을 찾아나가도록 자극하고 고무하는 철학입니다. 이것이 본래 이소룡의 의도인데, 세상 사람들은 전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이게 참 아이러니죠."

    이소룡2 브루스리2


    이소룡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이소룡이 지상 최강이라고 속단하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이소룡이 지상 최강인지 아닌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소룡을 단순한 영화배우로 오해하는 경우 만큼이나 큰 오해라고 하겠다.

    이소룡과 최영의를 비교하는 이야기가 무수하게 많으나, 두 사람은 상이한 무술철학과 경험을 가진 무술인들이다. 서로의 활동영역도 달랐다. 최영의는 실전과 도장경영에 주력했고, 반면에 이소룡은 개인지도와 영화촬영에 주력했다. 서로의 관심분야가 달랐기에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소룡은 말하기를 "나는 내가 세계 제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제 2인자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무술인 이소룡의 자세였다. 이소룡에 대한 우리의 평가도 그 자신의 견해를 따르는 게 가장 온당하리라 여겨진다.

    이소룡에 대해 증명된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하면 안된다. 반대로 증명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까지 공상으로 부풀려서도 곤란할 것이다. 이소룡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소룡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영화배우로서 영화 속에서 보여준 모습이 하나이고, 무술가로서, 그리고 무술 지도자로서 보여준 모습이 또 하나이다. 그 두 가지는 서로 중첩되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우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것이며 과장도 축소도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소룡에 대한 오해는 큰 것에서부터 사소한 부분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이소룡이 요절하고 검시했을 때 마약성분이 검출됐다고 해서 이소룡의 품행에 대해 오해를 산 일이 있으나, 이소룡은 당시 병을 앓고 있던 중이라 진통제로 처방받은 약물이었다. 마약복용을 한 것이 아니다. 이소룡은 갑자기 죽은 것이 아니며 용쟁호투 촬영 당시 이미 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영춘권 사부 엽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그 또한 사실이 아니다. 이소룡이 사부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진이 있다. 이소룡은 사부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그 당시 참석하지 않았어야 할 아무 이유도 없었다. 본래 스타에 대한 근거없는 험담은 흔하지 않은가.

    이소룡이 발차기를 태권도 사범 이준구에게 배웠고, 그 이전에는 이소룡이 전혀 발차기를 할 줄 몰랐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 또한 사실이 아니다. 이준구 사범에게 발차기와 태권도 기술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실제 영화 속에서 구현한 것은 사실이나, 태권도를 배우기 이전에도 이소룡은 이미 중국무술과 기타 무술의 발차기를 배우고 있었다. 다만 태권도를 통해서 그의 발차기가 더욱 세련되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소룡은 이준구 사범과 무술가로서 교류하며 서로의 기술을 가르쳐주던 사이였다.

    이소룡3 브루스리3


    이소룡의 마지막 작품인 "용쟁호투"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자.
    이소룡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초반부의 덤블링과 핸드 스프링 장면은 본인이 찍은 것이 아니라 대역배우가 연기한 것이다.
    이소룡은 무술인으로서 그 장면들이 불필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으나, 영화를 화려하게 포장하기 위해서 넣은 장면이다. 따라서 이소룡은 무술인으로서 직접 연기할 필요가 없었고, 그림을 멋있게 하기 위해 대역배우(스턴트맨)가 대신 연기하였다.

    반면에, 영화 중반부에 밥 월과 겨루기를 할 때 발이 잡히자 그대로 공중에서 회전하면서 상대의 턱을 차는 공중회전 발차기는 이소룡 본인이 연기한 것이다.

    철권 등의 게임에서 이소룡을 닮은 캐릭터가 마구잡이로 아무 때나 공중회전 발차기를 하기도 하나, 이는 게임이라서 의도적으로 이소룡의 무술적 의도를 무시한 것이다.
    이소룡이 그 장면에서 공중회전 발차기를 하는 것은 상대 밥 월이 이소룡의 발을 들어 넘어뜨리려고 하기 때문에 상대의 움직임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면서 그 힘을 역이용하여 그대로 차기에 들어간 것이다.
    이 장면은 주요한 장면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소룡 자신이 연기한 것이며, 대역을 쓴 것이 아니다.

    마지막 오해--- 이소룡이 죽은 것은 집안에 내려오는 저주 때문이란 소문도 돌았다. 그런 설정이 이소룡의 일생을 다룬 영화 <드래곤>에도 나왔으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이소룡이 죽은 원인에 대해서는 과로, 약물 과민 쇼크, 뇌종양 등 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의사 소견에 의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연사라는 것이다. 강인해보이는 이소룡이 갑자기 죽자 여러 소문이 무성했다. 신비의 무술가들이 점혈법으로 이소룡을 암살한 것이라는 웃지 못할 소문까지 돌았다.

    이소룡은 이미 용쟁호투 촬영 당시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통증을 참기 위해 약물을 복용했다. 이소룡은 당시에 한 시도 쉬지 못하고 과다한 업무로 몸과 마음을 혹사하고 있었다.
    이소룡의 대표작들이 전혀 쉬지 못하고 연달아서 나오고 있었으며, 막판에는 동시 촬영이 진행중이이었다(용쟁호투 & 사망적유희)는 점을 명심하자. 또한 그 영화가 몸이 고달픈 액션영화장르이고, 이소룡이 액션감독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이소룡의 죽음은 예견된 상황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소룡 말고도 과로하다가 요절한 사람들의 예는 종종 볼 수 있으며, 암도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소룡의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판단된다. 이소룡은 너무나 일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소룡 말년의 풍부한 다산성이 그의 요절을 부른 원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 2 > 최영의에 대한 오해

    최영의(최배달)에 대한 오해 역시 만만치 않다.
    최영의가 대결한 사람들은 별로 강자들이 아니거나, 검증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최영의1 최배달1

     

    최영의가 대결한 일본과 세계의 강자들은 공식적으로 실력을 검증받은 고수들이다.
    한 예로, 최영의가 삼각차기로 KO 시킨 붉은전갈 톰라이스라는 프로레슬러는 역도산을 쓰러뜨린 강자이다. 최영의는 톰라이스와 공식 경기장에서 수많은 관객들과 언론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경기를 했다.
    최영의가 일본 국내의 강자들을 이길 때도 많은 일본의 언론인들이 직접 목격하고 취재했다.
     

    최영의의 많은 국제경기들은 수많은 관중과 언론인 앞에서 벌어진 공개시합이었다. 최영의가 대결을 벌일 때는 비공개 시합은 거의 없었고 모두 다수가 지켜보는 공개된 장소에서 벌어진 대결이었다. 공식 시합도 상당히 많다.
    또한 최영의는 소와 대결을 벌일 때도 공개시합을 벌이고 영화필름에 담기까지 했다.
    따라서 최영의 선생의 무용담은 신뢰해도 좋은 상당한 신뢰성을 갖고 있다.
    최영의 선생도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일부 허풍쟁이 무술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최영의 선생의 신조는 "증명 없이는 신뢰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한다"였다고 한다. 따라서 최영의 선생은 실전과 공식시합을 통한 실력의 증명을 가장 중시했다.
    그의 실전공수도인 극진가라테도 그의 이러한 실전철학에서 나온 무술이다.

    최영의의 이소룡에 대한 공식견해는 두 가지가 확인된다. 이 모두 최영의 선생의 무술저서와, 최영의 선생의 아들이 쓴 저서인 "This is 최배달"이라는 책에서이다.
    하나의 견해는 "이소룡이 보여준 액션은 영화 속의 액션에 불과한데 어떻게 실전격투가인 나의 실력과 비교하는가"이며, 또 하나의 견해는 "이소룡은 몸무게를 더 불려야 한다"이다.
    이 두 개의 견해가 최영의 선생 본인과 그의 아들의 저서를 통해 공식 확인되는 이소룡에 대한 견해이다.

    이렇게 확인 가능한 견해 이외에--- 최영의 선생의 제자들이 이소룡에게 덤볐다가 몰매 맞고 도망 왔는데 최영의 선생이 침묵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나, 최영의 선생이 후년에는 이소룡의 실력을 인정해서 "실제로 붙어보기 전에는 모른다"라고 했다는 이야기 등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풍문에 불과하다. 세상에 근거없는 풍문, 즉 지어낸 이야기는 무수하게 많다. 그런 풍문들을 다 믿으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최영의 선생은 평소에 도덕성 배양을 강조한 무도가였다. 제자들 교육에도 엄격하고 바른 품성을 강조한 스승이었다. 따라서 이소룡의 도장에 그의 제자들이 쳐들어가거나, 특히 혼자 있는 이소룡에게 떼로 덤벼드는 비겁한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는 극진가라테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다.

    또한 이소룡의 도장에 쳐들어가거나 이소룡이 혼자 있을 때 떼로 습격하는 상황이 도대체 언제 일어났다는 말인가? 이소룡이 무명 시절에는 미국에 사는 이소룡에 대해 알지도 못할테니 이소룡에게 단체로 덤비는 사태가 벌어지기 힘들 것이고,
    이소룡이 유명해진 이후에는 영화촬영에 정신없어서 도장에 있지 않을텐데 도장 습격이라는 상황이 맞지 않는 것이다.

    이소룡의 도장은 주로 중국 전통 무술가들에게 도전받았다고 한다.
    이소룡의 개방적인 무술철학, 특히 외국인들에게 강습하는 것을 중국의 폐쇄적인 무술문화를 갖고 있던 화교들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이소룡은 칼을 든 자객들한테 불의의 기습을 받아 배에 부상을 입었으나 같이 있던 친구와 함께 격퇴했다는 일화도 있다.

    최영의2 최배달2


    최영의 선생의 경우는 그가 도장을 차리자 그의 도장에 도전하는 일본 무술가들이 연이어 나타나자 피곤함을 느낀 최영의 선생이 더 이상의 도전을 없게 하기 위해 도장파괴에 나선 것이라고 한다. 도장파괴를 하여 전 일본의 무도계를 평정해도 도전과 협박이 끊이질 않자 자신의 위력을 증명하기 위해 소와 격투하는 이벤트를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소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자 더 이상의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최영의 선생 역시 자객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자객을 죽이고(정당방위) 자객의 가족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한동안 그 가족과 함께 생활한 일화가 전해진다.

    최영의 선생에 대한 최대의 오해는--- 그가 중국의 태극권사 진 노인에게 졌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극적으로 꾸며진 픽션이라고 한다.
    최영의 선생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최영의 선생이 그 진 노인을 찾아갔을 때 노인이 너무 늙어보여서 차마 대결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노인에게 태극권에 대한 가르침을 청해서 배웠다고 한다. 단지 그 뿐이다.
    이 이야기기 이상한 쪽으로 과장되어, 어떤 경우는 태극권을 비롯한 중국무술 신비주의로 흐르고, 어떤 경우는 극단적인 중국무술 폄하론으로 흐르는 등 헛소문의 근원이 되고 있다.
    실제로는 최영의 선생이 태극권을 비롯한 중국무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고 한다. 다른 무술의 장점을 흡수해서 더욱 강한 무술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한다. 위대한 무술가들은 종합 격투가의 면모를 보이게 마련인데, 우매한 중생들은 타 무술에 대한 폄하와 특정 무술에 대한 숭배증세를 보이고는 한다. 이 모두 무술에 대한 소양 부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최영의 선생에 대한 마지막 오해도 해명하자.
    최영의 선생이 수련한 무술이 태권도라고 주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반일감정이 심하던 과거에는 그랬다. 최영의 선생의 무용담을 다룬 고우영 님의 만화 "대야망"에서도 극진가라테를 태권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최영의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가라테 도장에 입관하여 가라테를 수련한 정통 가라테인이다. 키친 후나고시의 가라테 도장에서 수련했으며 강유류도 배웠다고 한다. 그의 극진가라테 기술체계는 모두 가라테의 그것이며, 수련법도 쇠 나막신(게다) 수련법이 있는 등 지극히 일본적이다.
    그가 어릴 적에 머슴 범수로부터 택견을 배웠다고도 하고 18기를 배웠다고도 하나 어릴 적의 일일 뿐, 그가 일본에서 배우고 평생 동안 갈고 닦은 무술은 바로 가라테였다.

    여기서 한 가지 추가해서 말씀드릴 것은, 태권도는 원래 일제시대에 가라테를 배운 한국의 가라테인들이 만든 현대무술이란 사실이다.
    초기 태권도의 9대 문파 관장들은 모두 정식으로 가라테를 수련한 가라테인들이다. 그들의 스승은 일본의 가라테인들이었다.
    택견과 가라테를 혼동하는 분들도 계시나, 택견과 가라테는 엄연히 기술체계가 다르고 수련체계가 다르고 문화적으로도 크게 다르다. 특히 초기 태권도와 택견은 엄청나게 다른 무술이다. 또한 태권도인들은 택견에 대해 별 관심도 보이지 않았으며 기술도 별로 도입하지 않았다. 태권도 창립과정에서 약간의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태권도협회에서는 태권도의 위상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태권도가 한국 5000년 전통 무술이라는 신화를 보급시켰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늘날 태권도 위상이 높아지자 태권도협회의 관계자들도 이 역사적 사실을 솔적히 인정하고 있다.
    (신동아에 나온 태권도 국기원 부원장 이종우 님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된다)
    http://www2.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204/nd2002040010.html


    이러한 상황에서 최영의 선생은 한국의 태권도와 극진가라테를 통합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통합 도복까지 맞추고 한국에 와서 태권도인들을 만났다가, 우리나라 태권도계의 분열양상에 충격을 받고 통합시도를 포기하고 만다.
    가라테와 초기 태권도가 비슷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못해볼 일이었던 것이다.
    최영의 선생은 조국을 그리워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한국의 태권도가 한국 내에 충분히 보급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극진 가라테을 한국에 보급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영의3 최배달3


    최영의 선생에 대한 마지막 오해를 풀어보자.
    혹자는 최영의 선생의 "극진가라테 교범"을 읽고 최영의 선생이 너무 일본사람 같다면서 그의 민족정신을 의심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인의 시각일 뿐, 일본 현지에 사는 재일교포의 입장이란 다르지 않을까 싶다.
    최영의 선생이 일본국민들을 향해 "우리 일본인들은..."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입장 바꾸어 생각해보면, 어떤 주한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책을 쓰면서 "우리 한국인은..."이라고 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최영의 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맞지 않을까.
    최영의 선생은 일본에 살면서 일본문화인 가라테를 수련하고 발전시킨 사람이다.끝없이 일본 무도계와 정면대결한 사람이다. 그의 도전은 목숨까지 걸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한 그에게 일본에서 한국인 티를 내면서 살기까지 요구하는 건 좀 심한 요구는 아닐까?
    최영의 선생의 일본이름은 오오야마 마츠다쓰... 최배달이었다. 배달민족임을 생각하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조국이란, 자신이 창안한 무술인 극진가라테의 보급도 포기할 정도로 소중한 곳이었다. 그는 태권도가 한국에서 번창하고 전세계로 보급되기를 희망했고,
    심지어 극진가라테와 태권도를 통합하려는 꿈까지 꾸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를 우리가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목숨을 걸고 전 일본무도계와 대결한 사람에게 우리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닐까?


    < 3 > 종합

    이상 이소룡과 최영의에 대한 오해를 몇 가지 해명해보았다.
    이소룡과 최영의는 자신이 사랑한 무술에 모든 인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편견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무술인은 오직 자신이 증명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최영의 선생은 자신의 실전격투로 극진가라테를 증명했다.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철학과 영화로 절권도를 증명했다.

    이소룡4 브루스리4


    이소룡과 최영의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마칠까 한다.
    이소룡이 중국 전통무술가를 만난 자리에서 전통무술가는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해도 이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습니다. 한 번 마음대로 해보시오"
    이소룡은 그 전통무술가의 얼굴을 정권으로 세차게 질렀다.
    전통무술가는 기절하고 말았다.
    이소룡이 말했다.
    "이게 내 방식이오"

    이소룡은 말했다.
    "전통무술가들이 자신의 똥배에 대해서 기가 가득 차 있다느니 주장하는데,
    실제로 기가 차있든 말든 상관없이,
    무술가라면 몸관리를 해서 똥배가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최영의는 말했다.
    "내가 가르치는 도장에 다니는 어떤 청년의 어머니가 나에게 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내 도장을 다니기 전까지는 착실하지 못하고 제멋대로이던 아들이, 내 도장을 다니면서 가라테를 수련하더니 방 정리도 스스로 하고 어머니도 챙겨드리면서 자기 생활을 스스로 알아서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흐뭇해졌다. 가라테를 배움으로써 단지 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인격까지 도야된다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바다."

    최영의4 최배달4


    최영의는 말했다.
    "효는 삶의 근본이다."


    마지막으로 불세출의 협객 시라소니(이성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다.
    시라소니는 평생 싸움으로 날을 보냈다. 그의 싸움은 예술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고 탁월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숱한 전설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정치깡패 이정재 패거리에게 집단폭행을 당하고 죽을 뻔했다.
    그래서 이정재에게 복수하려고 총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역자 주: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소문일뿐 사실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말년의 이성순님 인터뷰에서는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답니다. -추풍님- )
    그러다가 시라소니는 말했다.
    "나는 예수님에게 귀의했다. 나는 평생 사랑을 모르고 살았다. 삶은 공포였고 불안이었고 끝없는 투쟁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투쟁을 멈추고 사랑의 삶을 살겠다."
    그리고 그는 싸움꾼이기를 포기하고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는 동료 '깡패'들만 왔다고 한다. 교회 사람들은 전혀 오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그의 화려한 싸움경력에 열광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정작 행복하지도, 자신에 대해 긍지를 갖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청춘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의 부정을 주변 사람들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시라소니를 직접 인터뷰해서 만든 만화나 소설, 영화는 많이 나왔다. 그러나 그 작품들 어느 곳에서도 시라소니의 변신에 대해서 긍정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그를 영원히 협객 시라소니로 기억할 뿐이다.


    싸움에 강하면서도 행복해지려면 아무 철학없는 싸움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무술철학을 가진 무도인, 무예인이 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없고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 없다.
    이소룡과 최영의 선생은 그것을 이루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무분별한 최강자론을 적용한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시라소니나 김두한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무술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이 아무리 싸움을 잘했어도 결국 그들은 한낱 깡패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소룡과 최영의는 무술인으로 존경받는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이소룡과 최영의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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